“사소한 일상에 웃음과 행복을 드립니다” [임효례 감탄사 회장]
“사소한 일상에 웃음과 행복을 드립니다” [임효례 감탄사 회장]
by 안양교차로 2017.05.31
‘웃으면 복이 온다’지만 웃을 일 없이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다보면 복이 와야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임효례 감탄사 회장은 웃음이 삶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웃음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다문화가정에 ‘사진’으로 ‘행복’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한 컷에 담긴 이야기로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봉사로 커진 웃음
웃음동아리 ‘감탄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사랑을 나누자’는 의미를 담아 만든 이름으로, 열 명정도의 회원들이 이찬휘 웃음강사에게 배운 웃음을 나누는 봉사를 지속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양지의 집에, 또 한 번은 보건소에 가서 자신이 배운 ‘웃음의 기술’을 더 많은 이들한테 전달한다.
“저희가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생각보다는 우리도 같이 배우면서 더 행복해진다는 생각으로 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녀가 처음 감탄사에 들어가게 된 건 2년 전으로, 웃음치료에 관심이 가던 중 우연히 중앙도서관에서 이찬휘 웃음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하루에 100가지 감사일기를 쓰자고 하시지만 저희는 아직 선생님만큼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머리로 받아들였으니 곧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그들이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찾는 양지의 집과 보건소는 웃음봉사를 하기에는 쉽지 않은 편이다. 장애인과 어르신들은 몸 전체를 사용하기 힘들거나 하는 말을 100% 이해하기 어려워 웃음을 터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이렇게 봉사를 하며 또 한단계 성장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친숙하게 다가가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 이후에는 기존에 있는 웃음치료는 조금 줄이고, 동화와 율동을 넣어서 더 재미있게 꾸며봤죠.”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빛을 발했는지 장애인과 어르신들이 ‘감탄사’를 맞이하는 표정이 무표정에서 미소로 바뀌어 갔다.
웃음동아리 ‘감탄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사랑을 나누자’는 의미를 담아 만든 이름으로, 열 명정도의 회원들이 이찬휘 웃음강사에게 배운 웃음을 나누는 봉사를 지속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양지의 집에, 또 한 번은 보건소에 가서 자신이 배운 ‘웃음의 기술’을 더 많은 이들한테 전달한다.
“저희가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생각보다는 우리도 같이 배우면서 더 행복해진다는 생각으로 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녀가 처음 감탄사에 들어가게 된 건 2년 전으로, 웃음치료에 관심이 가던 중 우연히 중앙도서관에서 이찬휘 웃음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하루에 100가지 감사일기를 쓰자고 하시지만 저희는 아직 선생님만큼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머리로 받아들였으니 곧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그들이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찾는 양지의 집과 보건소는 웃음봉사를 하기에는 쉽지 않은 편이다. 장애인과 어르신들은 몸 전체를 사용하기 힘들거나 하는 말을 100% 이해하기 어려워 웃음을 터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이렇게 봉사를 하며 또 한단계 성장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친숙하게 다가가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 이후에는 기존에 있는 웃음치료는 조금 줄이고, 동화와 율동을 넣어서 더 재미있게 꾸며봤죠.”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빛을 발했는지 장애인과 어르신들이 ‘감탄사’를 맞이하는 표정이 무표정에서 미소로 바뀌어 갔다.
사진으로 찾게 된 행복
그녀는 행복을 찾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다문화가정에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벌써 15년도 넘은 일이다. 15년 전에는 양주에 이주노동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연스럽게 사진교실을 열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언어의 장벽을 깨기 위해서는 사진이 적격이었다. 이후 군포로 이사를 오게 된 그녀는 군포에 있는 결혼이민자들을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열리는 사진교실을 열었다. 그녀가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들에게 정이 가는 것은 바로 청년시절 자신의 모습과 닮아서다.
“우리 고향도 시골이었는데, 저도 젊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어요. 서울에 가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이루려고요. 그런데 이분들도 그래요. 더 멀리 온 것뿐이지, 젊었을 때 저처럼 나름대로의 꿈과 포부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막상 와보니 생각지도 못한 힘든 상황이 펼쳐져 있고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위로와 공감을 줄만한 도구로 생각한 것이 사진이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들이 찍은 사진으로 두 번이나 전시회도 열었다. 주제는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가족’.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사진에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감동적이었어요. 기억에 남는 사진이 많았어요. 출근하면서 두고 가는 아이의 울고 있는 모습, 일을 하다가 크게 다칠 뻔한 위험을 막아준 고마운 장갑 같은 것들이죠. 사실 우리에게도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행복을 찾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다문화가정에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벌써 15년도 넘은 일이다. 15년 전에는 양주에 이주노동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연스럽게 사진교실을 열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언어의 장벽을 깨기 위해서는 사진이 적격이었다. 이후 군포로 이사를 오게 된 그녀는 군포에 있는 결혼이민자들을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열리는 사진교실을 열었다. 그녀가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들에게 정이 가는 것은 바로 청년시절 자신의 모습과 닮아서다.
“우리 고향도 시골이었는데, 저도 젊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어요. 서울에 가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이루려고요. 그런데 이분들도 그래요. 더 멀리 온 것뿐이지, 젊었을 때 저처럼 나름대로의 꿈과 포부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막상 와보니 생각지도 못한 힘든 상황이 펼쳐져 있고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위로와 공감을 줄만한 도구로 생각한 것이 사진이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들이 찍은 사진으로 두 번이나 전시회도 열었다. 주제는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가족’.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사진에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감동적이었어요. 기억에 남는 사진이 많았어요. 출근하면서 두고 가는 아이의 울고 있는 모습, 일을 하다가 크게 다칠 뻔한 위험을 막아준 고마운 장갑 같은 것들이죠. 사실 우리에게도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수혜자에서 봉사자로
2년 전부터 그녀는 결혼이민자들과 또 다른 봉사를 시작했다. 결혼이민자들이 봉사의 수혜자로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에 봉사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로, 경찰서와 연계해 봉사하는 치안봉사대다. 그녀는 치안봉사대 활동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결혼이민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나온 유인물을 나눠준 적이 있었어요. 저는 쭈뼛쭈뼛 거리며 유인물을 제대로 나눠주지 못하는데 이분들은 ‘읽어보세요’하면서 행인들이나 가게 내 사람들에게 잘 나눠주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이렇게 잘 하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이런 절박함이 없으면 여기서 살아가기 어렵다’고요.”
오랜 시간동안 이민자, 이주민과 살아가다 보니 결국 그녀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주노동자, 결혼이주민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 정착되었어요. ‘다문화’라는 편견이 아니라 그냥 이웃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또 이들 사이에 낳은 아이들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아닌 우리 아이들이에요. 이 아이들과 엄마가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모국어도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취재 강나은 기자
2년 전부터 그녀는 결혼이민자들과 또 다른 봉사를 시작했다. 결혼이민자들이 봉사의 수혜자로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에 봉사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로, 경찰서와 연계해 봉사하는 치안봉사대다. 그녀는 치안봉사대 활동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결혼이민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나온 유인물을 나눠준 적이 있었어요. 저는 쭈뼛쭈뼛 거리며 유인물을 제대로 나눠주지 못하는데 이분들은 ‘읽어보세요’하면서 행인들이나 가게 내 사람들에게 잘 나눠주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이렇게 잘 하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이런 절박함이 없으면 여기서 살아가기 어렵다’고요.”
오랜 시간동안 이민자, 이주민과 살아가다 보니 결국 그녀는 ‘모두 다 사람’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주노동자, 결혼이주민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 정착되었어요. ‘다문화’라는 편견이 아니라 그냥 이웃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또 이들 사이에 낳은 아이들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아닌 우리 아이들이에요. 이 아이들과 엄마가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모국어도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취재 강나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