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감으로 시작한 봉사, 이제는 삶이 되었습니다” [제과협회 군포의왕지부 이관형 지부장]
“의무감으로 시작한 봉사, 이제는 삶이 되었습니다” [제과협회 군포의왕지부 이관형 지부장]
by 안양교차로 2017.05.17
제과협회 군포의왕지부 이관형 지부장은 제과협회의 임원 중 한 사람이었기에 시작한 봉사가 17년간 이어져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과협회 임원들 전체가 봉사에 회의감을 느껴 모두 다 내려놓자고 했을 때, 임원들을 이끌어 다시 봉사를 시작하게 한 사람은 그였다. 이제 봉사를 의무감이라고 느끼기에는 너무도 그의 삶에 녹아든 까닭이다.
(제과협회 군포의왕지부 이관형 지부장)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빵을 전달하다
이관형 지부장은 제과협회의 임원으로는 17년을 보냈고, 그중에서도 지부장으로는 14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제과협회의 임원이라는 의무감으로 봉사를 시작한 지 어언 17년, 이제 봉사는 그의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이 되었다. 지금도 다른 임원들과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군포와 의왕에 있는 복지기관에 빵을 만들어 보낸다.
지부장을 포함해 제과협회의 임원이라면 당일 만들고 난 뒤 남은 빵도 헛되이 쓰지 않고, 전체를 푸드뱅크에 기부한다. 15년 전, 당시 강상섭 시장의 부인 부탁으로 남은 빵을 이관형 지부장이 복지단체에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 흐름은 지금까지도 제과협회의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간 봉사를 하며 기억에 남는 일도 많이 있었다. 제과협회와 인연을 맺었던 복지관에서 백세가 되신 어르신의 생신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신잔치를 열어드렸다. 자녀와 가족이 없어 의지할 곳 없던 어르신은 임원 한 명, 한 명의 손을 꼭 붙잡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복지관에서 생활하는 원생 중 한 명이 시집을 내자 회원들이 시집을 단체로 구매하기도 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빵을 전달하다
이관형 지부장은 제과협회의 임원으로는 17년을 보냈고, 그중에서도 지부장으로는 14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제과협회의 임원이라는 의무감으로 봉사를 시작한 지 어언 17년, 이제 봉사는 그의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이 되었다. 지금도 다른 임원들과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군포와 의왕에 있는 복지기관에 빵을 만들어 보낸다.
지부장을 포함해 제과협회의 임원이라면 당일 만들고 난 뒤 남은 빵도 헛되이 쓰지 않고, 전체를 푸드뱅크에 기부한다. 15년 전, 당시 강상섭 시장의 부인 부탁으로 남은 빵을 이관형 지부장이 복지단체에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 흐름은 지금까지도 제과협회의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간 봉사를 하며 기억에 남는 일도 많이 있었다. 제과협회와 인연을 맺었던 복지관에서 백세가 되신 어르신의 생신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신잔치를 열어드렸다. 자녀와 가족이 없어 의지할 곳 없던 어르신은 임원 한 명, 한 명의 손을 꼭 붙잡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복지관에서 생활하는 원생 중 한 명이 시집을 내자 회원들이 시집을 단체로 구매하기도 했다.
봉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
그는 이제는 예전처럼 직접 원생들을 대하며 봉사하기가 쉽지 않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요즘에는 프랜차이즈도 워낙 많고, 즉석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장사가 옛날만큼 되지 않아요. 그렇다보니까 빵집 사장님들이 봉사하기가 힘들죠. 제과협회에서 매달 나오는 소식지에 ‘봉사할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늘 싣는데도 봉사하겠다는 회원들이 거의 없어요.”
사실 이전만큼 회원들이 봉사에 적극적이지 않게 된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
“저희는 복지단체들이 모두 자비로 봉사를 하는 줄 알았어요.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더 많이 도와드리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더 많이 도와드릴 수 없어서 부끄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희가 도움을 드렸던 단체가 보호자들에게 복지생을 돌보는 대가를 받고 사업하는 단체더라고요. 시에서도 보조금을 받고요. 정말 어렵다는 말에 도움을 줬는데 알고 보니 평소에 양주를 즐겨 마실 만큼 사치스러운 원장도 있었고, 마치 사업처럼 다른 지역에 같은 이름으로 건물을 세운 곳도 있었어요. ‘우리가 이들의 사업을 도와줄 필요는 없지 않냐’며 ‘봉사를 그만두자’는 임원들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었죠.”
하지만 그는 임원들을 다독이며 봉사를 이어나가도록 이끌었다.
“어쨌든 우리가 빵을 주면 이 빵은 원생들에게 가잖아요. 그 빵을 다른 곳에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이 사람들을 거치더라도 우리가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죠.”
그는 이제는 예전처럼 직접 원생들을 대하며 봉사하기가 쉽지 않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요즘에는 프랜차이즈도 워낙 많고, 즉석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장사가 옛날만큼 되지 않아요. 그렇다보니까 빵집 사장님들이 봉사하기가 힘들죠. 제과협회에서 매달 나오는 소식지에 ‘봉사할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늘 싣는데도 봉사하겠다는 회원들이 거의 없어요.”
사실 이전만큼 회원들이 봉사에 적극적이지 않게 된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
“저희는 복지단체들이 모두 자비로 봉사를 하는 줄 알았어요.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더 많이 도와드리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더 많이 도와드릴 수 없어서 부끄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희가 도움을 드렸던 단체가 보호자들에게 복지생을 돌보는 대가를 받고 사업하는 단체더라고요. 시에서도 보조금을 받고요. 정말 어렵다는 말에 도움을 줬는데 알고 보니 평소에 양주를 즐겨 마실 만큼 사치스러운 원장도 있었고, 마치 사업처럼 다른 지역에 같은 이름으로 건물을 세운 곳도 있었어요. ‘우리가 이들의 사업을 도와줄 필요는 없지 않냐’며 ‘봉사를 그만두자’는 임원들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었죠.”
하지만 그는 임원들을 다독이며 봉사를 이어나가도록 이끌었다.
“어쨌든 우리가 빵을 주면 이 빵은 원생들에게 가잖아요. 그 빵을 다른 곳에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이 사람들을 거치더라도 우리가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죠.”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꿈을 제안하다
그는 15년 전부터 의왕시 청소년 지도위원도 겸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동네를 돌며 노래방이나 술집, PC방 등 청소년유해업소를 찾아다니며 청소년들의 일탈을 막는다. 이제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청소년유해업소 뿐만 아니라 공원이나 으슥한 공터 등 아이들이 모여 있기에 위험해 보이는 장소도 한 바퀴 둘러본다. 이곳에서도 오랫동안 봉사하다보니 어느새 부회장을 맡아 청소년 지도위원들을 이끌고 있다.
소년원에서 출소해 가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서 사회적응을 돕던 생활관에 빵을 주던 그는 어느 순간 생활관에서 제빵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
“제가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에 따라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지켜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도 처음부터 제빵을 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고,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제빵 기술을 배웠고, 지금 빵집을 열어서 여러분 앞에 섰다.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꿈이 생겼을 때부터 얼마나 열심히 하냐는 것이다.”
생활관 관장과 그는 따뜻한 빵이 오가며 따뜻한 정도 쌓였다. 관장은 ‘청소년에 관심이 많은 사장님 같은 분이 청소년선도위원이 되어주시면 안 되겠냐’며 그를 시에 추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관장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가 지금까지도 따뜻한 관심을 갖고 청소년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특별한 계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봉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까지 이십년 가까이 봉사를 해왔어요. 이것저것 욕심내서 새로운 봉사를 해보기보다는 우선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꾸준히 봉사하고 싶고요. 이렇게 하다가 청소년 선도위원처럼 ‘해야 겠다’는 마음이 드는 봉사는 시작할 겁니다.”
그는 15년 전부터 의왕시 청소년 지도위원도 겸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동네를 돌며 노래방이나 술집, PC방 등 청소년유해업소를 찾아다니며 청소년들의 일탈을 막는다. 이제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청소년유해업소 뿐만 아니라 공원이나 으슥한 공터 등 아이들이 모여 있기에 위험해 보이는 장소도 한 바퀴 둘러본다. 이곳에서도 오랫동안 봉사하다보니 어느새 부회장을 맡아 청소년 지도위원들을 이끌고 있다.
소년원에서 출소해 가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서 사회적응을 돕던 생활관에 빵을 주던 그는 어느 순간 생활관에서 제빵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
“제가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에 따라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지켜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도 처음부터 제빵을 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고,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제빵 기술을 배웠고, 지금 빵집을 열어서 여러분 앞에 섰다.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을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꿈이 생겼을 때부터 얼마나 열심히 하냐는 것이다.”
생활관 관장과 그는 따뜻한 빵이 오가며 따뜻한 정도 쌓였다. 관장은 ‘청소년에 관심이 많은 사장님 같은 분이 청소년선도위원이 되어주시면 안 되겠냐’며 그를 시에 추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관장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가 지금까지도 따뜻한 관심을 갖고 청소년들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특별한 계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봉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까지 이십년 가까이 봉사를 해왔어요. 이것저것 욕심내서 새로운 봉사를 해보기보다는 우선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꾸준히 봉사하고 싶고요. 이렇게 하다가 청소년 선도위원처럼 ‘해야 겠다’는 마음이 드는 봉사는 시작할 겁니다.”
취재 강나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