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사라지지만 마음은 계속 남아요” [이드프랑 베이커리 박희삼, 이정애 부부]
“돈은 사라지지만 마음은 계속 남아요” [이드프랑 베이커리 박희삼, 이정애 부부]
by 안양교차로 2014.02.04
돈과 명예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하지만 마음은 어떤가. 누군가가 켠 봉사의 불씨 하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 붙고, 그 불빛으로 인해 세상이 행복해진다면 그 마음은 영원하다. 세상을 위해 빵을 만드는 이드프랑 베이커리의 박희삼(53), 이정애(55) 부부는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빵으로 사랑 전하는 부부
안양시 농수산물도매시장 제이씨마트 한편에 자리 잡은 이드프랑 베이커리. 빵맛 좀 아는 사람이 찾는다는 이곳 제과점의 주인장, 박희삼, 이정애 부부는 인자한 풍모 못지않게 푸근한 인심을 지니고 있다. 10년 전부터 줄곧 도움이 필요한 곳에 빵을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 남편 박 씨는 처음 빵 봉사를 시작하던 날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건물 사장님이 ‘빵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면서 봉사를 제안하셨어요. 항상 봉사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하겠다고 했죠. 달팽이지역아동센터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어요.”
달팽이지역아동센터에는 매달 한 번씩 학생들을 위한 생일잔치를 연다. 부부는 그때 쓸 케이크와 빵, 음료수를 제공한다고. 한 번에 나가는 양이 어림잡아 50명분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 열리는 ‘몰래 산타’ 행사 시에도 케이크와 빵을 전달한다. 이 일을 1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해왔다니 그 아름다운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부부의 선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평촌역에서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돕는사람들(IDF)’의 봉사활동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것. 매주 목요일 열리는 이 행사에 제공하는 빵의 양은 50~60개. 매달 200개 이상의 빵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아내 이 씨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평소 만드는 것보다 조금 더 만들면 되는 건데요, 뭐. 사실 우리 공장장이 고생 많이 해요. 주문량이 많을 때도 군말 없이 봉사에 필요한 빵들을 만드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이외에도 부부는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요청에 스스럼없이 응한다. 그래서 부부의 빵은 ‘전국구’다. 이들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빵이 일선 봉사자들에 의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로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어 정말 기뻐요. 그분들이 저희 빵을 맛있게 먹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안양시 농수산물도매시장 제이씨마트 한편에 자리 잡은 이드프랑 베이커리. 빵맛 좀 아는 사람이 찾는다는 이곳 제과점의 주인장, 박희삼, 이정애 부부는 인자한 풍모 못지않게 푸근한 인심을 지니고 있다. 10년 전부터 줄곧 도움이 필요한 곳에 빵을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 남편 박 씨는 처음 빵 봉사를 시작하던 날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건물 사장님이 ‘빵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면서 봉사를 제안하셨어요. 항상 봉사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하겠다고 했죠. 달팽이지역아동센터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어요.”
달팽이지역아동센터에는 매달 한 번씩 학생들을 위한 생일잔치를 연다. 부부는 그때 쓸 케이크와 빵, 음료수를 제공한다고. 한 번에 나가는 양이 어림잡아 50명분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 열리는 ‘몰래 산타’ 행사 시에도 케이크와 빵을 전달한다. 이 일을 1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해왔다니 그 아름다운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부부의 선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평촌역에서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돕는사람들(IDF)’의 봉사활동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것. 매주 목요일 열리는 이 행사에 제공하는 빵의 양은 50~60개. 매달 200개 이상의 빵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아내 이 씨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평소 만드는 것보다 조금 더 만들면 되는 건데요, 뭐. 사실 우리 공장장이 고생 많이 해요. 주문량이 많을 때도 군말 없이 봉사에 필요한 빵들을 만드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이외에도 부부는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요청에 스스럼없이 응한다. 그래서 부부의 빵은 ‘전국구’다. 이들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빵이 일선 봉사자들에 의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로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어 정말 기뻐요. 그분들이 저희 빵을 맛있게 먹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역경 끝에 뜬 무지개, 봉사
부부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다가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가게를 내놔야 했다. 그 와중에 남편 박 씨는 산재를 입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대문에 옷가게를 얻었는데 알고 보니 사기 분양이었다. 그야말로 바닥까지 몰린 상황. 하지만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빵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려 애쓰던 아내 이 씨의 눈시울이 끝내 붉어졌다.
“빵 봉사는 저와의 약속이기도 했어요. 당시 힘들 적에 ‘내가 다시 빵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어려운 분들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결심했죠.”
소박한 꿈을 이룬 지금, 부부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빵 봉사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돌아왔을 때,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하다고 부부는 말한다.
“달팽이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학생들이 종종 가게로 찾아와요. 자기들이 만들었다면서 그림이며 편지며 손에 꼭 쥐고요. 또 섬마을에 들어간 봉사자가 ‘어르신이 전해달라더라’며 조개 한 봉지를 내밀기도 해요. 이럴 때면 제 마음이 잘 전달된 것 같아서 정말 기분 좋아요.”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남편 박 씨는 카트에 빵을 한가득 싣고 농수산물도매시장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찾아다닌다. 15년 전 제과점 홍보를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이드프랑 베이커리의 빵맛이 어느 정도 알려져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지만, 여전히 박 씨는 카트 손잡이를 잡고, 아내 이 씨는 묵묵히 카트에 빵을 실어준다.
“시장 상인들은 장사를 해야 하니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움직이는 거죠. 또 제 빵이 필요한 어르신들, 아이들, 어려운 분들에게 빵도 나눠주고요. 이제 카트 끄는 소리가 들리면 ‘오후 4시구나’ 생각하시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하루 못 나가면 ‘어제는 왜 안 나왔냐’며 걱정을 해주세요. 안양을 돌아다니다가 ‘어, 빵집 아저씨다!’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고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한 달에 두 번, 마트가 문을 닫을 때 겨우 휴일을 갖는다는 부부. 15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이 빵 봉사를 꾸준히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돈도, 명예도 아닌 ‘나눔의 마음’이었다고 부부는 술회했다.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각자의 여건과 형편에 맞게 봉사하면 돼요. 건강한 분들은 일선에서 직접 봉사하고, 저처럼 재능이 있는 분들은 그분들을 도와 함께 봉사하면 되죠. 첫 번째가 중요해요. 봉사하는 뿌듯함과 기쁨을 알면 누구든 생활 속에서 봉사하게 돼요. 봉사하기를 망설이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취재 강진우 기자 bohemtic@hanmail.net
부부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다가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가게를 내놔야 했다. 그 와중에 남편 박 씨는 산재를 입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대문에 옷가게를 얻었는데 알고 보니 사기 분양이었다. 그야말로 바닥까지 몰린 상황. 하지만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빵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려 애쓰던 아내 이 씨의 눈시울이 끝내 붉어졌다.
“빵 봉사는 저와의 약속이기도 했어요. 당시 힘들 적에 ‘내가 다시 빵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어려운 분들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결심했죠.”
소박한 꿈을 이룬 지금, 부부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빵 봉사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돌아왔을 때,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하다고 부부는 말한다.
“달팽이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학생들이 종종 가게로 찾아와요. 자기들이 만들었다면서 그림이며 편지며 손에 꼭 쥐고요. 또 섬마을에 들어간 봉사자가 ‘어르신이 전해달라더라’며 조개 한 봉지를 내밀기도 해요. 이럴 때면 제 마음이 잘 전달된 것 같아서 정말 기분 좋아요.”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남편 박 씨는 카트에 빵을 한가득 싣고 농수산물도매시장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찾아다닌다. 15년 전 제과점 홍보를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이드프랑 베이커리의 빵맛이 어느 정도 알려져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지만, 여전히 박 씨는 카트 손잡이를 잡고, 아내 이 씨는 묵묵히 카트에 빵을 실어준다.
“시장 상인들은 장사를 해야 하니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움직이는 거죠. 또 제 빵이 필요한 어르신들, 아이들, 어려운 분들에게 빵도 나눠주고요. 이제 카트 끄는 소리가 들리면 ‘오후 4시구나’ 생각하시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하루 못 나가면 ‘어제는 왜 안 나왔냐’며 걱정을 해주세요. 안양을 돌아다니다가 ‘어, 빵집 아저씨다!’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고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한 달에 두 번, 마트가 문을 닫을 때 겨우 휴일을 갖는다는 부부. 15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이 빵 봉사를 꾸준히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돈도, 명예도 아닌 ‘나눔의 마음’이었다고 부부는 술회했다.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각자의 여건과 형편에 맞게 봉사하면 돼요. 건강한 분들은 일선에서 직접 봉사하고, 저처럼 재능이 있는 분들은 그분들을 도와 함께 봉사하면 되죠. 첫 번째가 중요해요. 봉사하는 뿌듯함과 기쁨을 알면 누구든 생활 속에서 봉사하게 돼요. 봉사하기를 망설이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취재 강진우 기자 bohemti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