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면 행복해집니다” [시민운동가 김인봉 씨]
“더불어 살면 행복해집니다” [시민운동가 김인봉 씨]
by 안양교차로 2014.01.08
‘함께 하는 삶’을 꿈꿨다. 많은 장애물들이 그를 막아섰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시민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시민운동가 김인봉 씨는 이렇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그의 열정
김인봉(53) 씨의 시민운동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즈음 성균관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 김 씨는 민주화운동을 벌이다가 영장 없이 40일간 구금되고, 옥중 생활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시대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을 벌이다가 1984년 말, 안양으로 적을 옮겼다.
“당시 저는 ‘대학 나와서 기득권 행세를 하느니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안양에서 노동운동을 했죠.”
‘두 사람만 모여도 반국가단체’라는 말이 나돌았던 시대였다. 김 씨와 그의 동료들은 조심스럽게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원인모를 불면증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디스크까지 찾아왔다. 이런 몸 상태로 험난한 노동운동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87년 대선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김 씨는 1988년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가입해 지역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안양시민대학의 모체인 안양시민학교 설립에 일조했고, 안양청년학교를 열어 청년들의 힘을 결집시켰다. 이를 통해 소년소녀가장 돕기, 지역 독거노인 돕기, 각종 민족운동 및 시민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2004년에는 학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6년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그는 가장 먼저 아이들의 급식 문제에 눈을 돌렸다.
“이왕 아이들이 먹는 음식, 친환경농산물로 먹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의 뜻있는 분들 및 지역 생협과 힘을 합쳐 친환경급식시민행동을 만들었고, 현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죠. 이와 더불어 식생활교육네트워크와 친환경안양도시농업네트워크를 만들어 식생활 교육 및 농업 교육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김인봉(53) 씨의 시민운동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즈음 성균관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 김 씨는 민주화운동을 벌이다가 영장 없이 40일간 구금되고, 옥중 생활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시대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을 벌이다가 1984년 말, 안양으로 적을 옮겼다.
“당시 저는 ‘대학 나와서 기득권 행세를 하느니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안양에서 노동운동을 했죠.”
‘두 사람만 모여도 반국가단체’라는 말이 나돌았던 시대였다. 김 씨와 그의 동료들은 조심스럽게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원인모를 불면증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디스크까지 찾아왔다. 이런 몸 상태로 험난한 노동운동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87년 대선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김 씨는 1988년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가입해 지역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안양시민대학의 모체인 안양시민학교 설립에 일조했고, 안양청년학교를 열어 청년들의 힘을 결집시켰다. 이를 통해 소년소녀가장 돕기, 지역 독거노인 돕기, 각종 민족운동 및 시민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2004년에는 학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6년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그는 가장 먼저 아이들의 급식 문제에 눈을 돌렸다.
“이왕 아이들이 먹는 음식, 친환경농산물로 먹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의 뜻있는 분들 및 지역 생협과 힘을 합쳐 친환경급식시민행동을 만들었고, 현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죠. 이와 더불어 식생활교육네트워크와 친환경안양도시농업네트워크를 만들어 식생활 교육 및 농업 교육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 즐거움으로 꽃피우다
어린 시절 김 씨의 집은 가난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부모도 이혼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내 마음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가.’ 그러다보니 세상에 눈이 갔다. 부조리한 모든 것들을 바꾸고 싶었다. 이 생각은 지금껏 그의 마음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여러 가지 시민운동을 하면서 ‘함께 사는 건 참 행복한 일이구나’하는 걸 느꼈어요. 이 행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묻는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을 살며 왜 시민운동을 하느냐”고. 그럴 때마다 김 씨는 대답한다. “난 이렇게 사는 게 참으로 즐겁다”고. 사실 그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다. 그저 밥 세 끼 먹고,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그걸로 족하다.
“어려웠던 유년기와 청년기를 겪어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 다른 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믿습니다.”
어린 시절 김 씨의 집은 가난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부모도 이혼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내 마음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가.’ 그러다보니 세상에 눈이 갔다. 부조리한 모든 것들을 바꾸고 싶었다. 이 생각은 지금껏 그의 마음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여러 가지 시민운동을 하면서 ‘함께 사는 건 참 행복한 일이구나’하는 걸 느꼈어요. 이 행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묻는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을 살며 왜 시민운동을 하느냐”고. 그럴 때마다 김 씨는 대답한다. “난 이렇게 사는 게 참으로 즐겁다”고. 사실 그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다. 그저 밥 세 끼 먹고,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그걸로 족하다.
“어려웠던 유년기와 청년기를 겪어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 다른 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믿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행복한 세상을 꿈꾸다
인연은 불현듯 찾아왔다. 1998년 어머니가 “밥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같이 살 수 있다”며 자주 다니던 절에서 학대받던 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귀가 안 들리고 말 한 마디 못하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과거는 담배 연기 사라지듯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60년대에 찍은 아들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연고도 모르는 할머니를 하루아침에 모시고 살려니 머리가 복잡했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시민운동을 하는데, 내가 이분을 모시고 살지 못하면 말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17년째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김 씨에게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김 씨는 “오히려 할머니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할머니를 모시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를 통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분은 저희 가족이에요. 여든이 다 되셨는데, 앞으로 건강하게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움을 마음에 품고 시민운동을 해온 김 씨. 그는 앞으로도 국가의 근간이자 풀뿌리인 민중과 함께 보다 더 나은 세상,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쓸 생각이다. 그의 시민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취재 강진우 기자 bohemtic@hanmail.net
인연은 불현듯 찾아왔다. 1998년 어머니가 “밥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같이 살 수 있다”며 자주 다니던 절에서 학대받던 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귀가 안 들리고 말 한 마디 못하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과거는 담배 연기 사라지듯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60년대에 찍은 아들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연고도 모르는 할머니를 하루아침에 모시고 살려니 머리가 복잡했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시민운동을 하는데, 내가 이분을 모시고 살지 못하면 말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17년째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김 씨에게 “대단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김 씨는 “오히려 할머니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할머니를 모시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를 통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분은 저희 가족이에요. 여든이 다 되셨는데, 앞으로 건강하게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움을 마음에 품고 시민운동을 해온 김 씨. 그는 앞으로도 국가의 근간이자 풀뿌리인 민중과 함께 보다 더 나은 세상,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쓸 생각이다. 그의 시민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취재 강진우 기자 bohemti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