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예술공연단 홍옥자 씨 “어르신들은 제가 갈 때만 박수를 쳐요”
양지예술공연단 홍옥자 씨 “어르신들은 제가 갈 때만 박수를 쳐요”
by 안양교차로 2013.07.15
누군가를 노래로 행복하게 만드는 일도 봉사가 될 수 있다. 특히 세월을 다 보내고 아픈 육신에 허한 마음만 남은 어르신들이라면 대수롭지 않은 노래 한 곡에도 눈물이 핑 도는 법. 홍옥자 씨는 자신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젊은 자신이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래교실을 열고 있다.
노래로 봉사한다는 것
홍옥자 씨가 처음 봉사를 시작한 건 10여 년 전, 동네 노래교실에 취미로 발을 붙였다가 함께 노래를 배우는 친구들과 봉사모임을 꾸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름도 양지예술공연단이라고 지었다. 취미로만 그치기엔 노래가 너무 좋았던 그는 직접 노래강사로 나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역 내 경로당이나 요양원을 돌며 어르신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무료 공연이죠. 이유는 없어요. 처음에는 이게 봉사라는 생각도 못하고 시작했는걸요. 하다보니까 ‘아, 내가 하는 게 봉사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지금도 봉사라는 마음보다는 좋아하는 일로 보답한다는 생각이에요.”
안양3동에서 시작된 노래교실 봉사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졌다. 어르신들이 모인 곳에서 부를 때는 언제든지 달려가고 여럿이 함께 못 갈 때는 홍옥자 씨 혼자서라도 가서 노래를 띄운다. 그렇게 공연하는 횟수가 일주일에 3~4군데, 노래 교실만 17군데를 하고 있다니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성격이 되게 꼼꼼해요. 이렇게 좋은 활동을 하는데 시청에서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조비도 타냈어요(웃음). 좋은 일이니까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야죠. 노래로 봉사한다는 건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에요.”
노래로 봉사한다는 것
홍옥자 씨가 처음 봉사를 시작한 건 10여 년 전, 동네 노래교실에 취미로 발을 붙였다가 함께 노래를 배우는 친구들과 봉사모임을 꾸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름도 양지예술공연단이라고 지었다. 취미로만 그치기엔 노래가 너무 좋았던 그는 직접 노래강사로 나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역 내 경로당이나 요양원을 돌며 어르신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무료 공연이죠. 이유는 없어요. 처음에는 이게 봉사라는 생각도 못하고 시작했는걸요. 하다보니까 ‘아, 내가 하는 게 봉사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지금도 봉사라는 마음보다는 좋아하는 일로 보답한다는 생각이에요.”
안양3동에서 시작된 노래교실 봉사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졌다. 어르신들이 모인 곳에서 부를 때는 언제든지 달려가고 여럿이 함께 못 갈 때는 홍옥자 씨 혼자서라도 가서 노래를 띄운다. 그렇게 공연하는 횟수가 일주일에 3~4군데, 노래 교실만 17군데를 하고 있다니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성격이 되게 꼼꼼해요. 이렇게 좋은 활동을 하는데 시청에서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조비도 타냈어요(웃음). 좋은 일이니까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야죠. 노래로 봉사한다는 건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에요.”
노래봉사로 우울증 고치고 새 삶
자비로 차비와 식대를 써가며 봉사를 했던 그였지만 노래로 봉사를 한다니 가는 곳마다 교통비 정도로 얼마를 주더란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는데, 봉사를 앞에 두고 보니 자연스럽게 활동비가 생긴 것이다. “애당초 돈을 벌 목적이었다면 동네 노래교실을 하나 더 여는 게 낫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봉사는 순수한 봉사로 그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어머니들이 저를 너무 반겨주고 좋아해주시니까 그 자체로 행복한 거죠. 경로당에 공연 갈 때면 제가 도착하기 전부터 어머님들이 박수를 치면서 제 이름을 불러요. 제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환영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신기하게도 다른 노래강사가 오면 잘 모이지도 않던 어르신들은 홍옥자 씨의 노래교실에 푹 빠졌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만드는 그만의 노하우가 따로 있다. 가수가 될 것도 아닌데 죽기 살기로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된다는 것. 노래를 소통의 도구로 삼아 어르신들과 한 마음으로 교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가 노래교실 봉사하기 전에는 우울증 환자였어요. 제 나이 또래는 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노래교실 하면서 우울증이 싹 사라졌어요. 여러 어르신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노래를 배우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떤 강사는 도중에 힘들어서 울면서 그만두기도 하니까요.”
자비로 차비와 식대를 써가며 봉사를 했던 그였지만 노래로 봉사를 한다니 가는 곳마다 교통비 정도로 얼마를 주더란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는데, 봉사를 앞에 두고 보니 자연스럽게 활동비가 생긴 것이다. “애당초 돈을 벌 목적이었다면 동네 노래교실을 하나 더 여는 게 낫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봉사는 순수한 봉사로 그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어머니들이 저를 너무 반겨주고 좋아해주시니까 그 자체로 행복한 거죠. 경로당에 공연 갈 때면 제가 도착하기 전부터 어머님들이 박수를 치면서 제 이름을 불러요. 제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환영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신기하게도 다른 노래강사가 오면 잘 모이지도 않던 어르신들은 홍옥자 씨의 노래교실에 푹 빠졌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만드는 그만의 노하우가 따로 있다. 가수가 될 것도 아닌데 죽기 살기로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된다는 것. 노래를 소통의 도구로 삼아 어르신들과 한 마음으로 교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가 노래교실 봉사하기 전에는 우울증 환자였어요. 제 나이 또래는 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노래교실 하면서 우울증이 싹 사라졌어요. 여러 어르신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노래를 배우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떤 강사는 도중에 힘들어서 울면서 그만두기도 하니까요.”
다리 저는 사람도 노래 배우러 찾아와
어르신들의 마음을 읽고 성격을 잘 맞춰주는 것이 홍옥자 씨의 장점인 셈이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돈이나 벌러 다니라”며 낮춰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돈을 못 벌어도 봉사만 하면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교실로 번 약간의 수익도 어르신들의 다과를 사다드리는 데 쓴다고 하니 봉사에 대한 그의 애정을 알 것 같다.
젊은 시절엔 커튼과 이불보 파는 사업도 했고 한때 잘 나가는 사장님으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이젠 다 무색한 일이라고 말하는 홍옥자 씨. 나이가 들수록 몸이 편하고 마음이 즐거운 일이 제일이라며 노래교실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집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그를 위해 남편도 집안일을 도와주는 편이라니 응원군도 든든하다.
“봉사는 그냥 하면 쉬워요. 따로 방법이 없어요. 어머님들이 좋아하고 저도 즐기다보면 시간이 훌쩍 가죠. 봉사든 일이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분들도 저처럼 봉사하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처녀 시절 양품점을 운영하던 그는 옷을 맞추러 온 여자 고객에게 남편을 소개받고 결혼했다. 안양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차로 눈 감고 다닐 정도로 모르는 길이 없다. 각박하지 않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은 동네라고 했다.
“박달동 복지회관에 어머님들이 노래 배우러 100명 정도 와요. 걸음을 못 걷는 분들도 계셔요. 그런데도 노래가 좋아서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러니 제 역할이 얼마나 소중해요. 앞으로도 평생 노래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죠.”
취재 오혜교 기자
어르신들의 마음을 읽고 성격을 잘 맞춰주는 것이 홍옥자 씨의 장점인 셈이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돈이나 벌러 다니라”며 낮춰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돈을 못 벌어도 봉사만 하면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교실로 번 약간의 수익도 어르신들의 다과를 사다드리는 데 쓴다고 하니 봉사에 대한 그의 애정을 알 것 같다.
젊은 시절엔 커튼과 이불보 파는 사업도 했고 한때 잘 나가는 사장님으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이젠 다 무색한 일이라고 말하는 홍옥자 씨. 나이가 들수록 몸이 편하고 마음이 즐거운 일이 제일이라며 노래교실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집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그를 위해 남편도 집안일을 도와주는 편이라니 응원군도 든든하다.
“봉사는 그냥 하면 쉬워요. 따로 방법이 없어요. 어머님들이 좋아하고 저도 즐기다보면 시간이 훌쩍 가죠. 봉사든 일이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분들도 저처럼 봉사하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처녀 시절 양품점을 운영하던 그는 옷을 맞추러 온 여자 고객에게 남편을 소개받고 결혼했다. 안양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차로 눈 감고 다닐 정도로 모르는 길이 없다. 각박하지 않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은 동네라고 했다.
“박달동 복지회관에 어머님들이 노래 배우러 100명 정도 와요. 걸음을 못 걷는 분들도 계셔요. 그런데도 노래가 좋아서 그렇게 모인 거예요. 그러니 제 역할이 얼마나 소중해요. 앞으로도 평생 노래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죠.”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