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관악장애인복지관 박남숙 씨 “마흔 셋에 미용실 창업, 지금은 봉사로 더 행복해요”

관악장애인복지관 박남숙 씨 “마흔 셋에 미용실 창업, 지금은 봉사로 더 행복해요”

by 안양교차로 2013.07.15

박남숙 씨는 젊은 시절 서울 남영동에 있었던 서울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꿈이 미용사였던 그는 남편의 만류로 배움을 접은 뒤, 30년 가까운 세월을 생계에 매진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한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를 치유해준 것이 바로 봉사였다. 힘들었던 지난 시절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미용기술도 다시 배웠다. 이제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봉사이야기를 들어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 벌겠다…미용실 창업
“제가 크던 시절에는 미용을 하면 팔자가 드세다고 못하게 했어요. 꿈을 접었지만 살면서 한 순간에 머릿속에 미용 생각이 떠난 적이 없죠. ‘내가 언젠가는 하고 말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뒤늦게 꿈을 이룬 거예요.”
자식들이 출가하고 삶을 되돌아볼 시기, 43살의 나이에 그는 미용실을 창업했다. ‘진 헤어머리방’이라는 이름으로 안양4동 성원아파트 후문 앞에 문을 열었다. 남들은 일을 접고 쉰다는 나이에 미용 기술을 배워 창업까지 도전한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박남숙 씨는 8년을 미용실에 매진했다. 단골도 제법 생겼고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큼, 질리도록 일을 한 뒤에는 미련 없이 가게를 접었다. 결혼한 자식들 손자를 봐줘야 할 책임도 있었다.
그가 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9년. 한국부인회를 통해 안내 책자를 받은 뒤 마음이 동해 봉사 활동에 동참했다. 불우이웃 돕기를 비롯해 벼룩시장, 명절 캠페인 봉사를 하며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는 그. 국민연금을 탈 나이가 되자 내친 김에 국민연금 동안지사에서 식당 봉사도 하게 됐다.
“우울증 고쳐준 봉사 덕분에 인생 바뀌었죠”
“젊을 때는 먹고 사느라 봉사할 여념이 없었죠. 남편 사업이 실패하고, 생활이 밑바닥을 쳐본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우울증이 왔어요. 가을에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슬프고 그랬던 마음이 봉사하면서 차츰 회복이 되었어요.”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미용 일도 봉사를 통해 다시 손에 붙였다. 관악장애인복지관과 수리장애인복지관을 통해 소외계층의 이미용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 2009년부터 만안구와 동안구 약 13여 가정을 돌면서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다. 혼자 미용도구함을 들고 집집마다 방문해 알아서 척척 봉사를 한다. 8년 치 경험이 쌓이다보니 활동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이미용 봉사는 어쩌면 굉장히 특별한 활동이잖아요. 기술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고…. 미용실 하면서 돈 벌 때는 힘든 걸 몰랐어요. 하지만 봉사는 계산을 하지 않고도 마음을 비우고 할 수 있는 거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하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용봉사를 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는 고전무용 봉사도 한다. 고전무용 역시 늦깎이 나이로 배운 것. 오산정신병원에 초청돼 공연을 할 정도로 실력이 수준급이다. 수리장애인복지관 식당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배식 봉사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봉사하느라 바쁜 삶이다.
계산하지 말자,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답은 봉사뿐’
평생을 밥벌이에 매달렸는데 이제는 작은 돈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하는 일까지 한다. 작은 행복을 주변에도 권하고 다니지만, “네가 그거 해서 얻는 게 뭐냐”는 말을 듣기 일쑤다. 돈 벌기 어렵다는 것, 잘 쓰는 것은 더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지만, 봉사활동과 후원이 정말 값진 일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돈을 벌면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요. 봉사는 내가 순수해져서 행복해지는 일이죠. 저도 예전에는 남을 돕고 살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그런데 하고 보니까 너무 행복해요. 봉사하는 날에는 마음이 깨끗해져요. 머리에 계산할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겠어요.”
그러나 돌아서면 또 현실이 현실인 것. 인간사회에 뒤섞이면 텅 비었던 마음이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 차는 건 박남숙 씨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도 더욱 봉사를 멈출 수가 없다고, 힘닿는 데까지는 해야 한다고 그는 결심한다. 애초 1천 시간 봉사를 목표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앞으로 65세가 되는 3년 후까지는 부지런히 봉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제 또래 여자들 뭔가 막 배우러 다니고 놀러 다니죠. 저도 생각해요. 아, 내가 지금 뭔가 배우는 것과 봉사하는 걸 비교했을 때 어떤 게 더 가치 있을까. 그러면 결론은 또 하나예요. 봉사가 더 낫다는 것(웃음).”
얼마 전엔 어떤 장애인 어르신이 그러더란다. “예전에 장애인을 보면 우습게 여겼는데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느냐”고.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생이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디뎌나가는 자세를 봉사를 통해 배운다.
“식당에 장애인 어르신들 와서 잡수실 때 옆에서 가시도 발라드리고, 말벗도 되어드리면 너무 행복해요. ‘아,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하고. 물론 몸은 힘들죠. 그래도 끝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흐뭇하고 편안할 수가 없어요.”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