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봉사단체 '이온세' 정신애 씨 "가족 없는 할머니 장례식 때 상주 노릇해 주위에서 깜짝 놀랐죠"

봉사단체 '이온세' 정신애 씨 "가족 없는 할머니 장례식 때 상주 노릇해 주위에서 깜짝 놀랐죠"

by 안양교차로 2013.06.28

봉사는 하나의 만남이고, 어떨 땐 핏줄보다 가까운 인연이 될 수 있다. 봉사하는 자에겐 헌신의 보람을, 봉사를 받는 사람에겐 생각지도 못한 축복을 전해되는 것, 그것이 바로 봉사라는 걸 정신애 씨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했다. 2011년, 새해의 첫 번째 칭찬주자인 그는 봉사를 계기로 아픈 무릎을 고쳤고, 피붙이 하나 없던 한 할머니의 인생 끝자락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봉사로 만난 인연, 친엄마와 친딸처럼
"보통 사람이 아니다." 15년 전 그가 안양에서 봉사를 처음 시작할 때 아파트 부녀회에서는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전라도 목포에서 살았던 그는 아이들 학교의 어머니회에서 회장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특별히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슨 일을 시작하면 스트레스 잔뜩 받는 스타일, 정신애 씨는 그런 타입이었다.
"석수동 한신아파트 부녀회장을 하면서 독거노인 반찬배달 봉사를 시작했어요. 글쎄요, 저는 정말 엉겁결에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을 만나게 되었죠."
당시 나이 여든인 할머니를 알게 되면서 정신애 씨는 봉사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죽고, 남편마저 병환으로 잃은 뒤 할머니는 혈혈단신 혼자서 고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혼자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던 할머니는 마치 친딸처럼 반찬을 가져다주고 말벗이 돼주는 정신애 씨에게 조심스럽게 마음 문을 열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어온 게 12년의 세월이 쌓였다. 그동안 할머니는 정신애 씨 도움으로 요양원을 드나들기도 하면서 제법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치매가 심해지면서 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양원에 다시 들어간 뒤 안산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세 달을 버티던 할머니는 끝내 숨을 거뒀다.
"할머니 가시는 길 제가 모두 책임질게요"
정신애 씨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할머니의 가시는 길을 모두 책임졌다. 장례식장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상주 역할을 했다. 발인 때 영정사진 들 사람이 없어서 둘째 아들을 시켰다. 평소 할머니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 장례식장을 찾아와 "자식보다 더한 지극정성"이라면서 이례적으로 10시 염미사를 허락해주었다.
"생전에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내가 어쩌다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의지하고 살아왔느냐. 너무 고맙다' 그 말 생각하니 돌아가실 때 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지금도 할머니 가슴에 묻고 우리 엄마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정신애 씨는 현재 봉사단체인 '이온세(이 온 세상에 봉사를)'에서 활동하고 있다. 독거노인 가정방문 봉사를 하며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말동무를 해주거나 운동지도를 할 때면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어르신들에게 좀 더 효율적으로 봉사를 하기 위해 만안구노인복지센터의 노인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안양5동 노인복지센터에서 식당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 노인대학에서는 8년 동안 있으면서 스포츠댄스를 비롯해 각종 재주를 익혔다. 밥 퍼주고 반찬 담아주는 게 큰일은 아니지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이 손잡고 인사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고.
"봉사로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게 기쁨이죠. 제 나이에 새로운 친구 만들기 쉽지 않잖아요. 쉽게 속내를 열지 않는 어르신들이 제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는, '아, 내가 정말 보람 있는 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봉사로 관절염 고치고, 우울증도 사라져
그 역시 봉사를 하기 전 우울증과 무릎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전력이 있다. 평소 일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라 무릎통증이 더욱 심해져 갈 때였다. 용하다는 한의원 전부 찾아다니던 끝에 서울 포이동에 있는 유명 한의사에게 침을 맞고 병이 호전됐다. 불교신자인 그는 "신앙심이 수술을 미루는 대신 봉사를 하게 했다"고 말했다. 남을 위해 살면 고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봉사를 하루도 쉬지 않았던 그. 다리를 오래 쓰면 오히려 병이 악화될 것 같았지만, 기적 같이 3년 만에 구부러진 무릎이 펴졌다.
"제가 자유롭게 봉사만 할 수 있고 건강하기만 하다면 평생 남에게 헌신하면서 살겠다는 각오가 있었어요. 그런데 약 먹으면서 봉사 다니니까 어느새 쑤신 것도 사라지고 걷는 데도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신기하죠(웃음). 그 전엔 사람들이 나더러 다 ○○○이라고 놀릴 정도였는데 어느 날 제가 정상인처럼 건강해진 거예요. 저는 그게 봉사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실은 정신애 씨는 남편과 젊은 시절 떨어져 홀로 기러기 엄마로 사남매를 키운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10년 넘게 봉사를 했지만 자식들이 봉사활동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목포에서 주류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은 최근 사업을 정리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산다. 그는 여전히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는 셈이다.
"남편하고 같이 살았다면 봉사 못 했을 거예요. 참 이상한 관계죠?(웃음) 그래도 괜찮아요. 남한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하죠. 그 쾌감은 정말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거예요."
그는 봉사를 위해 수원여대에서 호스피스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다. 최근에는 자비를 털어서 학원을 다녀 노인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봉사에 관해선 이제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정신애 씨는 "봉사는 내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걸 희생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며 "내 속에 있는 모든 걸 비우고 상대를 대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걸 봉사를 통해 깨달았다"고 말했다.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