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안양시자원봉사센터 이귀자 님 '퇴직 후 우울증, 어르신 봉사하면서 저절로 치유됐죠'

안양시자원봉사센터 이귀자 님 '퇴직 후 우울증, 어르신 봉사하면서 저절로 치유됐죠'

by 안양교차로 2013.06.28

"퇴직 후 우울증, 어르신 봉사하면서 저절로 치유됐죠"

나이가 들면 갱년기가 온다.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이에겐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귀자 씨는 50대 중반까지 영업직에서 왕성하게 일을 하던 '커리어 우먼'이었다. 2005년 화려한 은퇴를 했지만, 퇴직 이후의 삶은 기대했던 장밋빛 생활이 아니었다. 우울증과 디스크가 오더니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하루하루 아파트 14층 난간을 부여잡고 밑을 내려다보는 게 일이었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다. 그가 봉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언니, 누가 나 좀 총으로 쐈으면 좋겠어"
"퇴직하고 처음 서너 달은 좋더라고요. 여유롭게 등산도 하고, 이것저것 배워보기도 하고. 그런데 몇 달 더 지나니까 마음이 공허해지고 뭔가에 머리가 눌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노후는 이런 게 아닌데…' 이귀자 씨는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애들도 다 컸고 남편도 돈 벌어다주는 데 뭐가 불만이냐"고 물었지만,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외출이 싫어서 집에 눌러앉아서 두문불출 한 게 그만 허리디스크에 걸려버렸다. 얼마 뒤 친정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죽자 '내 인생은 이렇게 내리막 길'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난 뒤에는 정말 살기 싫더라고요. 오죽하면 언니에게 전화해서 '누가 나 좀 총으로 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주변 동료가 그에게 봉사를 권했다고 한다. 처음엔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집에만 누워 있으면 뭐하겠냐는 심정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동안구여성회관 노인급식 봉사로 일하고 집에 돌아온 날, 이귀자 씨는 몇 달 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급식소에 줄을 선 어르신들은 자신의 10년 뒤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단다. 정신없이 밥을 퍼 담고, 식판을 놓으면서 어르신들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고.
어르신 운동 봉사하면서 우울증 저절로 치유돼
"그 다음 주, 또 그 다음 주 봉사를 가면 갈수록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르신들은 제가 딸처럼 느껴지시는지 '같이 먹자'면서 저를 무척 반겨주세요. 그러면 저는 고기도 찢어드리고, 반찬을 수저에 놔드리기도 하면서 정을 붙이죠. '이런 게 봉사라면 나도 한 번 봉사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양시자원봉사센터에서 봉사 교육을 받은 뒤로는 본격적인 봉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4주 간의 교육기간 동안 자신에게 맞는 봉사는 어르신 봉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수료 후 만안구 노인보건센터의 경로당을 돌면서 어르신 '건강지킴이' 봉사를 했다. 함께 스트레칭을 하면서 운동하는 봉사를 통해 이귀자 씨도 덩달아 건강해졌다. 디스크 수술을 한 뒤 봉사를 하기 전에 허리를 구부려도 손이 바닥에 닿지 않았던 것도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내친 김에 비산동 사회복지관에서 치매 어르신들을 위한 레크레이션 봉사까지 손을 뻗었다. 처음에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면 인상을 쓰고 째려보던 어르신들이 1년 쯤 지나자 함박웃음을 짓고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 봉사하기 전에도 워낙 노는 걸 좋아했던 터라 어르신들과 율동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목이 잠기고 집에 가면 녹초가 돼 쓰러져 자리에 눕기 바빴지만, 이귀자 씨는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이 치유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봉사를 하는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퇴직하고 3달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지금 이귀자 씨에게 "바쁘니까 빨리 전화 끊으라"면서 야박하게 굴었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귀자 씨는 "경로당에서 어르신들 보면 엄마 생각이 더욱 자주 나서 만져주고 잘해드린다"며 "엄마가 지금 살아 계셨다면 훨씬 잘해드렸을 텐데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돈 벌기 급급한 지난 날 후회돼…더불어 사는 삶이 최고"
그는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을 볼 때 봉사의 기쁨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엔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돈 벌기에 혈안이 된 철부지였던 것 같다고. 부아가 치밀고, 스트레스를 머리에 이고 다니던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지금은 그저 휴대폰을 잘 못 다루는 어르신들에게 문자 메시지 전송법을 일러주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대신 저장해주는 일에 보람을 느낄 따름이다.
"봉사하기 전엔 '내가 젊은 시절 너무 방탕하게 살아서 벌을 받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금은 마음도 생각도 모두 바뀌었죠. 진즉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걸, 왜 그렇게 팍팍하게 살았는지 몰라요. 직장 다닐 때 머리 터지게 싸웠던 후배가 있는데 지금 전주에서 여관 운영하면서 살아요. 걔 딸 결혼식에 갔더니 나를 보면서 막 울더라고요. '지난 일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언니랑 제일 많이 싸워서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지나고 보니 정말 돈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중요한 건 더불어 사는 삶이죠."
이귀자 씨는 한때의 자신처럼 우울증에 걸린 중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결코 나이 들었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낙담할 때 봉사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정말 필요로 하는 봉사처를 만나게 되고, 더불어 남은 인생의 의미 역시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
"봉사는 저 같은 사람도 해요. 저도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청소, 설거지 등 주부들이야말로 할 줄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죠. 봉사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우선 나에게 맞는 봉사가 무엇인지 발견했으면 좋겠어요. 봉사 속엔 대접받고 돈 많이 버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숨어 있답니다."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