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호계동성당 봉사자 김혜남 씨 "눈에 살기 돌던 재소자 눈물 흘릴 때 가슴 찡했죠"

호계동성당 봉사자 김혜남 씨 "눈에 살기 돌던 재소자 눈물 흘릴 때 가슴 찡했죠"

by 안양교차로 2013.06.28

김혜남 씨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 젊은 시절, 길 가다가도 구걸하는 사람 그냥 못 지나쳤던 자신의 성미는 타고난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녀원에 들어간 그를 한동안 관찰하던 신부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저마다 맡겨진 달란트가 다릅니다. 자매님은 결혼을 하셔서 가정과 사회를 섬기시는게 좋겠습니다." 그 후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운 30년의 세월 동안 그가 한 일은 다양하다. 부녀회, 아파트조합장, 안양문고 임원 등 주로 조직을 이끌어가는 일이다. 김혜남 씨는 "내세우는 봉사, 남의 얼굴 세워주는 겉치레를 잘 못한다"며 "봉사도 성격 따라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동정하는 마음으로 봉사…"누구나 죄는 짓잖나. 재소자들 운이 없었을 뿐"
김혜남 씨는 현재 호계동 성당에서 봉사하면서 안양교도소 재소자들을 면담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정성껏 음식을 싸갖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면서 재소자들의 허름한 마음을 매만져주는 일이다. 대개는 무의탁 재소자들인데 연고가 없다보니 봉사자들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3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재소자들과 마음 문을 열고 한마음으로 어울리는 기회를 얻는 것. 벌써 20년 째 하고 있는데 한결같은 봉사로 법무부장관 상을 타기도 했다.
"재소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만약 내 자식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기 안 들어왔을 텐데' 하는 마음이에요. 사실 큰 죄를 짓고도 감옥에 안 가는 사람들 많잖아요. 당장 저부터도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보다 죄 지은 일이 많거든요. 때문에 재소자들을 보면 항상 연민이 느껴져요. 만약 내가 재소자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그들을 돌본다고 생각했으면 진즉에 그만뒀을 일이죠(웃음)."
처음엔 부녀회 활동을 계기로 봉사를 하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부녀회에서 여럿이 모여 다니면서 하는 봉사는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은 봉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란 굳은 고집을 갖고 있다. 이후 현재 살고 있는 호계동 아파트의 조합장까지 해봤지만, 봉사의 순수함을 지킬 수 없는 자리라는 생각에 오래 머물진 못했다. "조합장 한 번 하면 집이 한 채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김혜남 씨는 사익에 대한 집착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오히려 주변에 어려운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집 한 채를 잃어버릴 정도로 순진한 면모가 더 많다.
"내 가족 심란하게 하는 봉사는 하지 말아야죠"
"저는 사람을 잘 믿어요. 그렇게 안 보이죠? 제가 '세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어려운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남편이 참 고맙죠. 이런 저를 감내하고 살아줬으니(웃음)."
서울에 살다가 결혼을 계기로 안양에 오게 됐다는 그는 대학시절 화학을 전공했다. 4수 끝에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전과를 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졸업을 했단다. 원래는 사회복지 관련학과를 전공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못했다. 결혼 이후 직장생활은 해본 적이 없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남편이 술 취한 날 대리기사 노릇을 하거나, 아이들 뒤치다꺼리 하다 보니 20년의 세월이 훌쩍 갔다고. 하고 싶은 봉사도 했지만, 배우고 싶은 공부는 못했던 시기였다. "결혼하면 공부 계속하게 해줄게"라는 남편 말은 공치사였지만, 대신 자신이 봉사를 틈틈이 할 수 있도록 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고 있다.
"저는 내 가정을 잘 보는 일도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해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하잖아요. 우선 내 가정을 잘 돌봐야 봉사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지금도 손주들을 봐주고 있어요. 그 덕분에 딸아이가 애를 하나 더 낳기로 했고요(웃음). 출산율 때문에 걱정이 많은 나라에 한 시름 덜어주는 일도 봉사잖아요. 내 가족들을 심란하게 하는 봉사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성당에서 노인대학을 섬기는 일도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이라도 나이가 일흔, 여든을 넘긴 부모를 곱게만 봐줄 자식이 어디 있을까. 가정에서 소외된 어르신들은 호계동 성당에 모여 노인대학에서 즐겁게 생활한다. 수지침, 레크레이션 등 4시간을 꽉 채운 프로그램은 모두 김혜남 씨가 기획한 것. 매년 봄이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1박 2일 캠프를 다녀오기도 한다. 자기 부모 돌봐준다는 데 협조 못할 자식 없을 터, "당신이 모실 여건이 못 되니까 우리가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노인대학을 꾸려가고 있다. 김혜남 씨는 "어르신들 모습이 10년 뒤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이 일도 우습게 볼 수 없다"면서 "내가 늙고 싶은 모습,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봉사 덕분에 가족력인 암에도 안 걸려
김혜남 씨가 봉사의 혜택이라며 들려준 얘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암이 가족력이 있어 어머니부터 언니 동생 다섯 자매가 모두 암에 걸렸는데 유독 김혜남 씨만 건강하다는 것. 건강관리 제대로 하지 않는 그이지만, 봉사하면서 병 걱정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딸들은 "엄마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 암에 안 걸린 것"이라고 말한다고. 돌아보면 누굴 미워하거나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은 적이 없다. 그런 마음 때문에 병에 안 걸린 거라면, 봉사에서 얻은 마음이기에 그 대가를 충분히 누린 셈이다.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한 재소자가 생각나요. 살인미수로 들어왔는데 눈에 언제나 살기가 맺혀 있는 거예요. 봉사 가면 만날 고개 숙이고 음식만 먹는 사람이 어느 순간 마음문이 열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본 모습을 드러냈어요. 나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완고하던 그 분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 이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되었죠."
김혜남 씨의 남은 꿈은 소박하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지만 없는 여건에서도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하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우리가 남에게 얼마나 폐를 끼치고 사는 생각하게 된다"며 "앞으로도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 이웃에게 복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