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웃음치료강사 문덕남 씨> ˝웃음치료, 나누는 행복의 시작이죠˝

<웃음치료강사 문덕남 씨> ˝웃음치료, 나누는 행복의 시작이죠˝

by 안양교차로 2013.06.28

"웃음치료, 나누는 행복의 시작이죠"

문덕남 씨는 원래 소위 잘 나가는 입시강사였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17년 간 담임교사를 했던 그에게 입시학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10년을 근무하면서 연봉 1억대의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긴 건 2000년 3월 4일. 남편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올 게 왔구나'하는 심정으로 문덕남 씨는 그날로 강사 일을 접었다. 봉사자로서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제 남편 고쳐주시면 남은 삶은 이웃을 위해 살게요"
남편을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그는 종교에 매달렸다. '하나님, 제 남편 고쳐주시기만 하면 이후엔 내 이웃을 위해 살게요.' 주변에서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냐"며 그를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문덕남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를 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인생 1막'이 비로소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 그래서였을까. 신기하게도 그의 남편은 수술 한 번, 그 흔한 물리치료 한 번 안 받고 18일 만에 퇴원했다. 휠체어도 안 타고 아내의 부축을 받고서. 담당의사는 "현대의학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저는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생각해요. 퇴직한 이후로 한동안 저는 남편 병수발에만 매달렸어요. 한방치료를 통해 돌아간 입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혼자서 제 앞가림을 다 하게 되더라고요. 너무 감사했죠."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남편이 생활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자, 그는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받았다. 2002년의 일이었다. 아파트 소식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안양호스피스선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김승주 목사와의 연인도 그렇게 시작된 것. 8기 교육을 받고 봉사자로 활동하던 문덕남 씨는 웃음치료라는 새로운 분야를 체험하게 됐다.
"대학 다닐 때부터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환자들을 가만히 보니까 웃을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레크레이션에 제가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발견하곤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어르신들을 위한 신바람 나는 봉사, "건강박수 비법 알려드릴까요?"
웃음치료에 대한 개념 정립도 채 안 돼 있을 때였다. 그는 한국레크레이션협회와 한국웃음연구소에서 웃음치료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굳이 웃음치료를 봉사에 접목하지 못하더라도, 이왕에 봉사를 하는 것 웃으면서 봉사를 하면 신바람 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문덕남 씨의 웃음치료 강의는 입소문을 거듭해 교회나 노인복지회관 등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한동안 국민건강보험공단 화성지사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보건소에서 주최하는 말기암 가족 행사에 참여해 환자들과 만나기도 한다. 강사 섭외비라는 건 없다. 교통비를 주면 받고, 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저는 먹고 살기 위해 봉사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강의료 같은 건 따로 안 받죠. 받더라도 다음번에 어르신들 빵이나 간식거리를 사다주는 식으로 다시 돌려줘요(웃음)."
웃음치료가 이뤄지는 건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건강에 관심 많은 어르신들인지라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얘길 들려주면 관심을 기울인다. 문덕남 씨는 건강박수로 강의 초반 청중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다리를 어깨너비 만큼 딱 벌리고 손바닥을 펴서 10초에 30번 박수를 치는 거예요. TV에서 이북사람들이 박수 치는 것 보셨죠? 이렇게 '짝짝짝짝짝짝짝' 치라고 말해요. 그럼 박수소리가 우레처럼 나거든요. 그때 제가 '저를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폭소가 터지는 거죠."
"나중에 돈 달라고 할 거지?" 묻는 어르신에게 "사랑으로 봉사해요"
그에게 웃음치료는 의학적으로 전문적인 치료의 개념이 아닌, 어르신들과 함께 한바탕 놀아주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자신의 강연을 듣고 아이처럼 활짝 웃는 모습을 볼 때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고. 문덕남 씨는 웃음치료 말고도 어르신들 목욕봉사, 호스피스 봉사도 열심이다. 봉사는 자신이 좋은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권하고 다닌다.
"가끔 친구들에게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후원금을 좀 내라고 하면 '왜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에 하느냐'는 답변이 돌아와요. 기왕 후원금 내려면 소아암 어린이나 실제 도움이 되는 환자들에게 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거죠. 하지만 전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태어날 때 조산원 도움 받는 것처럼, 죽을 때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거든요. 잘 태어나는 것 못지않게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어요?"
8년 간 봉사를 해보니, 성질머리 있던 그 자신이 먼저 달라졌다며 호탕하게 웃는 문덕남 씨. 누가 가시 돋친 말을 해도, 이유 없이 화를 내더라도 노여움을 타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단다. 그저 하루에 주어진 삶 자체가 아름답고 감사할 따름인 것이다. 봉사 덕분에 그 자신 중병을 소리 없이 지나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한 번은 병원에 갔는데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냐고 물어서 깜짝 놀랐다고. 의사가 말한 시기에 열심히 용각산을 먹었을 뿐이었단다. 대장결핵을 앓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호스피스 봉사하면 간혹 어떤 어르신들이 그래요. '나중에 돈 달라 할 거지?'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부득부득 우기시는데, 일주일을 말없이 보살펴드리니 나중엔 물으시더라고요. '그럼 돈도 안 받고 이런 일 왜 하는데?' 그럼 제가 말씀드리죠. '저는 종교의 힘으로, 예수님의 힘으로 이 일을 합니다.' 그러면 그분도 저처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그게 봉사를 하는 저의 유일한 보람입니다."
'봉사가 너무 전문적인 일만 있어서 좀 어렵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문덕남 씨는 이렇게 말한다. '할 일은 많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봉사를 찾아보라'고. 지금도 호스피스 병동에 가면 2시간짜리 자기 얘기를 들어줄 상대를 찾는 어르신들이 널려 있단다. 그 말을 들어주는 것도 엄연한 봉사인 셈이다. 문덕남 씨는 "알고 보니 봉사하는 분들도 다 자기 영역들이 있더라"며 "봉사를 하고 오지만 그 뒤에 오는 기쁨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