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어요"[이옥전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 고문]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어요"[이옥전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 고문]

by 안양교차로 2017.08.08

일 년에 한 번, 모든 가정에는 적십자회비 지로고지서가 배달된다. 이 지로고지서를 통해 만원을 기부하면, 각 지역의 적십자에서는 이 마음을 모아 다양한 봉사활동을 수행한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선풍기 하나 없이 생활하는 이웃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주기도 하고, 수해나 가뭄의 피해를 입은 농가에 부족한 일손을 보태주기도 한다.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에서 현재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옥전 전 회장은 적십자회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4명의 가족이 각각 한 달에 만원씩 기부하도록 자동이체를 해놓고, 대한적십자 봉사활동도 지속하고 있다.
[이옥전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 고문(중앙)]

다사다난했던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 결성
현재도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에서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옥전 전 회장은 대한적십자가 군포시지회를 결성할 수 있도록 초기에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포에 단 하나의 봉사단을 운영하던 대한적십자는 5개동을 모아 군포시지회를 결성하기 위해 동사무소 동장에게서 이옥전 전 회장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기에 여러 차례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에서는 군포시지회를 결성할만한 사람으로 그녀를 고집했고, 결국 그녀는 군포시지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5개동 중 하나를 맡되, 군포시지회의 총 회장은 맡지 않았다. 그런데 초대회장이 6개월밖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면서 그녀가 다시 물망에 올랐다. 군포시지회 결성 전부터 군포시지회 결성에 애써온 것은 물론, 결성 후에도 수석부회장을 맡아 전반적인 관리를 모두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총회에서 투표로 그녀가 회장으로 선출되어 연임까지 하면서 4년 동안 회장 자리에 앉았다.
“걱정했던대로 할 일이 정말 많았어요. 적십자에서는 불우이웃에게 전달할 물품이 꽤 많은 편이에요. 그 물품들을 전달하는 한편, 그 외에 따로 봉사활동이나 기부에 뜻이 있는 분들을 모아 후원을 받거나 봉사를 하실 수 있도록 했죠.”
그녀의 이러한 노력으로 처음 5개동의 적십자봉사단으로 시작했던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는 9개동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고, 총 인원도 380명에 달했다.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가 산본 신도시에 들어온 93년도부터 이어온 꾸준한 봉사도 있었다. 통장으로 활동하면서 이어온 가야복지관 봉사, 바르게살기협회 총무를 맡아 진행했던 결식아동을 위한 점심 마련 봉사를 보며 그녀의 진심과 열정을 응원해주는 이들이 대한적십자 활동도 도와주고 믿어줬다.
자연재해, 복지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이웃들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한편, 다른 지역의 아픔에도 귀 기울였다. 태안에 기름유출이 있었을 때는 하루에 60명씩 가서 헌 옷과 수건으로 바위에 낀 기름을 닦았다.
“그때 저희 적십자 봉사단을 포함해서 일반 봉사자들이 천 명이 모였어요.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적십자에서 밥차를 지원했는데 천 명에게 배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저와 총무 둘이서 천 개의 식판을 설거지 하는데 끝나지가 않더라고요.”결국 그렇게 무리를 한 결과, 그녀는 엄지 손가락 아래에 있는 근육에 염증이 생겨 한 달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눈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300명의 인원이 파프리카 농장 20개동을 작업하기도 하고, 경기도 광주 물난리에도 10명의 봉사자가 투입되었다.
“특히 마음이 아팠던 곳이 수해를 많이 입었던 고급상추 하우스였어요. 빚을 져가며 고급상추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물난리 때문에 수확도 못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안타깝죠. 한편으로는 이렇게나마 도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녀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현재도 봉사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실 대한적십자 군포시지회라는 조직을 만들어두고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지금은 봉사자들 구하기도 어렵고, 제가 회장이 아닌 고문이라는 자리에서 나서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갑자기 제가 손을 놔버리면 도움이 필요한 분들은 기다리시잖아요. 그 분들은 정부나 다른 봉사단에 수혜를 받기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예를 들어서 가족은 있지만 가족들이 돌보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찾으려고 하면 다 보이더라고요. 또 여기를 찾았다 싶으면 또 다른 쪽에서 방치되는 사각지대가 생기기도 하고요.”
그녀는 ‘군포시지회에 회장이 있는데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니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많은데’라는 생각에 다시 봉사에 뛰어들곤 한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한다. ‘그놈의 봉사가 뭔지’
20년의 봉사, 20년의 추억
그녀가 봉사를 하며 살아온 20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20년 동안의 추억이 모두 봉사와 맞닿아있다.
“그때 당시에 같이 봉사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때 봉사하러 갔던 그곳, 그곳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자주 이야기하곤 해요. 그게 다 추억이더라고요. 제가 봉사하지 않 았다면 저한테 그런 추억이 남아있겠어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즐겁게 뜻깊은 일을 할 수 있어서 늘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가까운 이들에게 늘 봉사를 권하곤 한다. ‘돈은 안 생기지만 그만큼 추억이 생긴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봉사를 하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요양보호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니 봉사로 돈도 생긴 셈이다.
“그 때 당시에는 회장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따 놨는데요. 지금은 회장으로 있을 때보다 마음도, 시간도 여유로워져서 요양보호사로 활동을 시작 했어요. 봉사할 때는 돈을 받지 않고 했던 일을 이제는 돈을 받고 하지만 전 이 일도 봉사라고 생각해요.”지금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도 힘들다며 요양보호사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이옥전 전 회장 자신은 봉사할 때보다 훨씬 더 쉽게 일을 한단다. 봉사를 하면서 더 힘든 일들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요양보호사 활동은 ‘봉사하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서 할 수 있었다는 그녀는 ‘어떤 이유든 좋으니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시작하길 바란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어려운 이웃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리고 조금이나마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봉사를 하면서 보니까 어려운 이웃은 어려운 이웃들이 돕더라고요. 그나마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돌아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취재 강나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