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봉사는 내 운명" [전국환경감시협회 신창열 군포지부장]

"봉사는 내 운명" [전국환경감시협회 신창열 군포지부장]

by 안양교차로 2016.10.18

330번째 칭찬주인공

우연히 시작하게 된 봉사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었다. 봉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봉사를 최우선으로 살아간 그는 벽이 상장과 상패로 가득할 만큼 많은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칭찬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하는 봉사에 비하면.
40여 년 전 우연히 마주친 봉사활동
신창열 씨가 봉사를 시작한 계기는 약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당시 20대였던 그는 예비군 교육을 받으러 간 곳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을 환경미화를 위해 새벽부터 봉사할 수 있는 청년을 찾는다는 동장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봉사를 자원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을 해버렸어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새벽부터 봉사를 하기로 했는데 잠에서 깨는 꿈만 여러 번 꾸다가 결국 새벽에 나가지를 못했어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일부터는 꼭 나오겠습니다’라고 얘기한 뒤 수년 동안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동장은 마이크를 들고, 중대장은 빗자루를 들고, 그는 리어카를 끌며 부산의 작은 동네의 환경미화를 맡았다. 쓰레기 수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제 꽃길 조성으로 범위가 넓어졌고, 그는 작은 개울 주변으로 코스모스와 나무를 심었다. 그가 아름답게 꾸민 그 길은 머지않아 시민회관을 건립하고 나서는 많은 이들이 찾는 시민 회관 옆길이 되었다.
“뿌듯했죠. 시민회관 준공식을 하면서 시민회관 전경이 쫙 방송되는데 코스모스가 쫙 핀 그 길이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 공으로 동장과 중대장은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지만 그는 새마을 교육 연수를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통령 표창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는 표창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봉사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또 다른 봉사를 시작했다. 야간에 시작한 파출소 방범대였다. 그 이후 그는 외국으로 일을 하러 떠났고, 1년 뒤 다시 귀국을 했다.
직위보다는 봉사, 싸움보다는 평화
그는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서 청년연합회에서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지역 사회 순찰을 비롯해 지역 내 봉사를 위주로 했던 이 청년연합회에서 오래 활동을 하다가 97년도에 그는 군포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파트에 입주해 동대표를 맡게 되면서 그는 통장들의 소개로 다시 새마을연합회로 들어가 각종 행사에서 수신호를 통해 교통정리를 하는 교통봉사대, 야간 방범을 하는 방범대 활동을 병행하며 봉사활동을 도맡아 했다.
“제가 그 당시 두부공장에서 일했는데 밤 12시부터 1시까지 쉬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지역을 순찰을 했죠. 그런데 제가 사는 군포 1동이 아닌 군포 2동만 순찰을 돌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파출소가 군포 2동에 있어서 방범대도 군포 2동에서만 활동하는 것이었어요.”
이 사실을 깨닫게 된 뒤 그는 군포 2동에 방범대를 조직했다. 당시 군포 토박이가 아닌지라 지인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 명, 두 명 모은 인원으로 방범대를 운영했다. 그렇게 방범대를 이끌어오던 그의 순수한 마음은 봉사단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이들의 욕심에 지고 말았다.
“어렵게 만든 방범대였지만 방범대 직위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제가 이끌어가기 어려워졌어요. 봉사활동을 하러 왔는데 싸울 순 없으니 그냥 직위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로 넘겨주고 나왔어요.”
봉사하려고 태어난 인생
그 후 그는 전국환경감시협회에 관심이 생겨 방문을 하게 되었고, 마침 그날은 전국환경감시협회는 회원 자격을 위한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시험을 본 뒤 돌아왔지만 두 달이 되어도 연락이 없자 탈락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그는 전국환경감시협회에 연락을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다만 착오로 인해 합격 소식이 전달되지 못한 것뿐이었다. 합격여부 확인을 계기로 삼아 그는 전국환경감시협회 본부장과 친해지게 되었고, 열심히 봉사를 하다 보니 군포 지부까지 맡았다.
“저는 봉사단체에 들어가면 얼마 안 돼서 장을 맡아서 단체를 이끌어가게 되더라고요.”
그 이유는 그만큼 봉사에 매진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없는 살림에 봉사를 위한 사무실 겸 사용하려고 가게를 얻거나 봉고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보람도 그만큼 컸다. 군포 2동 적십자회를 이끌 때는 경기도 31개 시군구를 통틀어 군포 2동 적십자회가 우수상을 받았다. 동 단위로 우수상을 받은 적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 군포2동 적십자회에서는 밭을 저렴하게 빌려 이곳에 배추 등을 심었고, 수확한 채소들로는 김장을 담가 독거노인에게 전달을 했다.
최근 전국환경감시협회에서도 그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강진에 가서 집고치기, 수지침, 미용 봉사를 하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양로원을 찾아 목욕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고민은 단 한 가지다.
“제가 사실 나이가 70이 다 되어가니까 후임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그런데 저희 봉사단에서 후임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큰 봉사단체에는 그나마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처럼 지원이 전혀 없고, 오히려 회비를 걷어서 운영하는 단체로는 오지를 않아요.”
그는 마지막으로 봉사의 의미를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전 이렇게 봉사하면서 살려고 태어난 거구나 싶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계속 해야지요.”

취재 강나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