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백마 탄 왕자 대신 불러주세요 [안양 여성의전화 최병일 가정폭력상담소장]

백마 탄 왕자 대신 불러주세요 [안양 여성의전화 최병일 가정폭력상담소장]

by 안양교차로 2015.09.01

로맨스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을 구하는 것은 결국 여성이었다. 여성을 모든 폭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여성의전화’ 회원들은 조금씩 힘을 합쳤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쓰고, 돈을 내가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구해낸 지 벌써 20여년이 넘었다.
주부, 여성운동가로 다시 태어나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다. 게다가 ‘집안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건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회적인 인식도 심하다. 96년 여성학을 공부하기 위한 모인 10명의 주부들은 이렇게 가정 내 평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여성의전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97년 3월에 안양 여성의 전화 발대식을 하면서 여성운동가로 변모했다.
여성의전화는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전화 상담을 넘어 필요한 경우에는 법적, 의료적, 생활 지원까지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법적인 문제가 얽혀있다면 변호사에게 법률 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고, 고소장 작성을 도와주며 처벌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한다.
하루는 친부에게 맞아 피를 흘리는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하던 상담원이 아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처럼 의료지원이 필요할 때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해자와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에는 안양의전화 쉼터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가정 안에서가 아닌 직장 내 문제에도 해결사로 나선다. 남들은 경미하다고 생각하는 성희롱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심한 경우, 업무정지에 이르는 법적인 처벌이 이뤄지도록 진술서나 탄원서를 낼 수 있도록 한다.
문제해결보다 중요한 건 문제 예방
안양 여성의전화는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 발생 자체를 줄일 수 있도록 예방에도 힘쓰고 있다. 첫 번째로는 여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초중고,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 강의를 한다. 이곳들은 성희롱, 성폭력 예방 강의가 의무적이지만 문제는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다. 가정 안에서 살아가는 전업주부나 노인, 자영업자, 소기업 근로자들에게 더욱 빈번하게 피해자가 생기므로 강의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크지만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서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2년 전부터 안양 여성의전화 사무실 앞에서는 1인 시위를 하고, 비산 이마트 사거리에서는 ‘기억의 화요일’이라는 여성폭력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매달 둘째 넷째 화요일 12시부터 1시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성의전화 회원들과 함께 학생들, 비산 내 자치센터 구성원들이 적게는 5~6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캠페인에 참여한다.
또한 호주제 등 가부장적인 제도를 폐지하고, 여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가정폭력 특별법, 성폭력특별법, 성매매특별법 등의 제정하도록 했으며,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스토킹방지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양 여성의전화를 이끌고 있는 최병일(51) 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은 이런 여성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인식이라고 말한다.
“여성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양성 모두에게 있어요. 페미니스트인 남성은 여성운동에 긍정적이고, 남성우월주의 의식을 가진 여성은 부정적이에요. 몇 백년간 내려져오는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꾸준히 활동해야 해요. 또 어렸을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전인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죠.”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흔한 기적
오랜 활동의 결과, 안양 여성의전화를 통해 상담을 받고 새 삶을 얻은 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지난 일이다. 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아온 여대생이 안양 여성의전화에 도움을 청했다. 상담을 통해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옥 같은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결혼은 했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남편과 헤어졌고, 그로 인해 다시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으나 지금은 잘 회복했다며, 그녀는 자신이 상담으로 큰 힘과 용기를 받았듯 자신도 그 씨앗을 심고 싶다는 장문의 편지를 안양 여성의전화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렇게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다른 이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여성의전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기적이다.
또한 지난 5월 24일에는 ‘세계 평화걷기대회’라는 행사를 열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두 명의 여성운동가들을 포함해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DMZ를 걸으며 통일을 기원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의미있는 여성운동으로 인정받았으며, 앞으로도 매년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여성과 남성을 저울에 놓고 잰다고 하면, 평형이 아니에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폭력 피해자의 90%이상이 여성입니다. 물론 이 비율은 지금 낮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한쪽 저울이 너무 기울어져있어요. 여성 쪽의 저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집중지원이 필요해요. 균형을 이룬다면 저희 단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죠. 저희도 늘 그런 날을 기대하면서 여성운동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최병일 소장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방관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이웃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을 당했을 때 경찰에 알리든, 상담이라도 받아보라고 꼭 말해주세요. 저희 여성의전화는 문턱이 굉장히 낮아요. 언제든지 전화로 상담하시면 신상을 공개하지 않고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취재 강나은 기자

<안양 여성의전화>
대표전화 : 031-442-5385
상담전화 : 031-466-1366(성폭력)
031-468-1366(가정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