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희망과 추억을 선물하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 박재민봉사자]
사진으로 희망과 추억을 선물하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 박재민봉사자]
by 안양교차로 2014.10.21
우리는 지나가는 시간조차 안타까울 때 이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자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사진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담긴다. 사진을 찍는 이들도 이 추억을, 그리고 이것으로 생길 삶의 희망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찍는다. 그리고 박재민(59)씨 스스로도 사진을 찍는 시간만큼은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
세 시간마다 하는 투석에도 멈출 수 없던 봉사
박재민 씨를 만난 곳은 군포에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였다. 박 씨를 오랫동안 봐온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지회장 이진원 씨는 박 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박재민 회장님을 만난 지 벌써 7년 정도 되었네요. 그 때는 눈이 조금 불편하시기는 했지만 투석을 하실 정도로 건강이 나쁘진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분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세요.
본인의 재능을 이용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셔서 행사 진행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주시고요. 그 외에도 후원자 개발이나 행사지원도 계속 도와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요. 감동적이죠. 다만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안타깝고 걱정돼요.”
이 씨의 말처럼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만성신부전증으로 3시간에 한 번씩, 하루 4~6번씩 투석을 해야 한다. 투석을 한 직후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안정을 취해야 하고, 저혈당 때문에 급격히 당이 떨어질 때는 단 음료나 설탕을 바로 섭취해야 한다. 게다가 눈도 불편한 상태이다.
그런데 박 씨는 “시간 맞춰서 투석만 하면 나머지 시간을 봉사할 수 있어요. 오히려 집에만 있는 것보다 이렇게 운동 삼아서 좋은 일하면 더 좋죠.”라며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그러면서도 “투석 시간 때문에 봉사를 맘껏 할 수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가 봉사를 시작한 것은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아주 오래 전이다. 충북 옥천에서 보낸 그의 청소년기는 사회지클럽이라는 지역사회봉사단체의 봉사활동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사진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사진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78년 군포로 올라오면서 자신이 배운 사진술을 동호회를 통해 회사 동료들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중 5명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자신 또한 금정역에서 97년도 10월부터 99년도까지 사진관을 운영했다.
박재민 씨를 만난 곳은 군포에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였다. 박 씨를 오랫동안 봐온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지회장 이진원 씨는 박 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박재민 회장님을 만난 지 벌써 7년 정도 되었네요. 그 때는 눈이 조금 불편하시기는 했지만 투석을 하실 정도로 건강이 나쁘진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분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세요.
본인의 재능을 이용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셔서 행사 진행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주시고요. 그 외에도 후원자 개발이나 행사지원도 계속 도와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요. 감동적이죠. 다만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안타깝고 걱정돼요.”
이 씨의 말처럼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만성신부전증으로 3시간에 한 번씩, 하루 4~6번씩 투석을 해야 한다. 투석을 한 직후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안정을 취해야 하고, 저혈당 때문에 급격히 당이 떨어질 때는 단 음료나 설탕을 바로 섭취해야 한다. 게다가 눈도 불편한 상태이다.
그런데 박 씨는 “시간 맞춰서 투석만 하면 나머지 시간을 봉사할 수 있어요. 오히려 집에만 있는 것보다 이렇게 운동 삼아서 좋은 일하면 더 좋죠.”라며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그러면서도 “투석 시간 때문에 봉사를 맘껏 할 수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가 봉사를 시작한 것은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아주 오래 전이다. 충북 옥천에서 보낸 그의 청소년기는 사회지클럽이라는 지역사회봉사단체의 봉사활동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사진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사진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78년 군포로 올라오면서 자신이 배운 사진술을 동호회를 통해 회사 동료들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중 5명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자신 또한 금정역에서 97년도 10월부터 99년도까지 사진관을 운영했다.
모두에게 인정받은 봉사에 대한 열정
각 단체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는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돕는 단체가 점차 늘어났다. 이주외국인 합동결혼식부터 시작해서 이웃사랑후원회, 어린이재단에서도 그의 셔터소리는 이어졌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봉사를 하느라 그에게 주어진 자리들도 많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서는 회장을 맡고 있고, 시각장애인연합회와 안양호스피스봉사단에서는 주기적으로 사진기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회장으로 있는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 가장 애정이 많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은 양로원, 군부대, 요양원에 위문공연을 다닌다. 현재 70명 정도가 소속되어 활동을 하고 있고,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하는 봉사자들과 봉사에 관심이 많은 연예인들이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서는 6개월에 한 번씩 3~400명의 어르신께 식사를 대접하고 이후에 열리는 공연도 기획한다. 개인택시협회에서 1년에 한 번 어르신들 바닷가 구경시켜드릴 때에는 바닷가에 무대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협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과 서로 도우며 봉사활동을 한다.
이처럼 봉사에 헌신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에는 경기 우수자원봉사자 증을 받았다. 우수자원봉사자 증은 연간 봉사활동 100시간 이상을 달성한 봉사자들을 위해 경기도가 시행하는 제도 중 하나. 여기에 시장 상, 국회의원 상 등 봉사활동으로 안 받은 상이 없을 정도다.
각 단체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는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돕는 단체가 점차 늘어났다. 이주외국인 합동결혼식부터 시작해서 이웃사랑후원회, 어린이재단에서도 그의 셔터소리는 이어졌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봉사를 하느라 그에게 주어진 자리들도 많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서는 회장을 맡고 있고, 시각장애인연합회와 안양호스피스봉사단에서는 주기적으로 사진기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회장으로 있는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 가장 애정이 많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은 양로원, 군부대, 요양원에 위문공연을 다닌다. 현재 70명 정도가 소속되어 활동을 하고 있고,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하는 봉사자들과 봉사에 관심이 많은 연예인들이다.
이웃사랑문화예술단에서는 6개월에 한 번씩 3~400명의 어르신께 식사를 대접하고 이후에 열리는 공연도 기획한다. 개인택시협회에서 1년에 한 번 어르신들 바닷가 구경시켜드릴 때에는 바닷가에 무대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협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과 서로 도우며 봉사활동을 한다.
이처럼 봉사에 헌신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에는 경기 우수자원봉사자 증을 받았다. 우수자원봉사자 증은 연간 봉사활동 100시간 이상을 달성한 봉사자들을 위해 경기도가 시행하는 제도 중 하나. 여기에 시장 상, 국회의원 상 등 봉사활동으로 안 받은 상이 없을 정도다.
봉사도 사람이 하는 일
그는 이렇게 많은 봉사를 하게 된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봉사라고 하는 것이 친구가 됐든, 이웃이 됐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인연이 닿아 봉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봉사의 길이 열리면서 폭이 더 넓어지고요. 저도 다른 이를 만나 봉사의 폭을 넓혔듯, 다른 사람도 저를 만나 봉사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봉사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봉사로 얽힌 길이었고, 그 또한 굉장히 넓은 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더욱 자원봉사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임을 설명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어렵지만, 이럴 때일수록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봉사자들 중에 악한 사람은 없잖아요.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사람도 없고요. 봉사가 줄어들고 사회가 따뜻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살기 힘들고 각박해져요. 그리고 어려울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렵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봉사자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마당발인 그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배우자도 위암으로 투병 중이고, 그 자신도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지만 그는 건강한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해내고 있음에 더욱 그가 빛나보였다.
취재 강나은 기자 naeun113@naver.com
그는 이렇게 많은 봉사를 하게 된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봉사라고 하는 것이 친구가 됐든, 이웃이 됐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인연이 닿아 봉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봉사의 길이 열리면서 폭이 더 넓어지고요. 저도 다른 이를 만나 봉사의 폭을 넓혔듯, 다른 사람도 저를 만나 봉사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봉사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봉사로 얽힌 길이었고, 그 또한 굉장히 넓은 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더욱 자원봉사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임을 설명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어렵지만, 이럴 때일수록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봉사자들 중에 악한 사람은 없잖아요.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사람도 없고요. 봉사가 줄어들고 사회가 따뜻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살기 힘들고 각박해져요. 그리고 어려울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렵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봉사자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마당발인 그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배우자도 위암으로 투병 중이고, 그 자신도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지만 그는 건강한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해내고 있음에 더욱 그가 빛나보였다.
취재 강나은 기자 naeun1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