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투데이

이웃사랑봉사단 이나영 회장 '30년 넘게 봉사했지만 환갑에도 힘든 줄 몰라요'

이웃사랑봉사단 이나영 회장 '30년 넘게 봉사했지만 환갑에도 힘든 줄 몰라요'

by 안양교차로 2013.06.28

"30년 넘게 봉사했지만 환갑에도 힘든 줄 몰라요"

29살부터 시작해 30년 동안 봉사를 해온 사람이 있다. 올해 환갑인 이나영 회장. 혈혈단신으로 탑골공원, 장애인복지관, 결손가정 등을 가리지 않고 물질로, 육체로 봉사해온 그는 2004년 이웃사랑봉사단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돈이 없으면 몸으로, 몸이 안 되면 시간이라도, 그도 아니면 관심이라도 가져달라고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약 매달 120kg의 쌀을 독거노인에게 일일이 배달해주는 이가 있다면, 매년 결손가정에 5천포기 김장을 해 나르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후원자를 찾아다니며 봉사로 헌신하는 이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매년 나들이를 가고, 연예인을 초대해 잔치를 열어주는 이를 단순히 봉사자로만 볼 수 있을까? 믿기 어렵지만 이나영 회장은 그런 사람이다. 부끄러움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아야 후원금이 모인다"고 말하는 그.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봉사하는 걸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되면 꼭 봉사를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29살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내 손이 닿아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기꺼이 돕는 게 도리죠. 사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봉사 단체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희석되어서 후원을 받기 어려워요."
이나영 회장은 현재 독거노인과 결손가정, 그리고 지역교회 공부방 아이들을 돕는 일을 거르지 않고 있다. 김장을 해주거나 쌀을 배달해주고 밑반찬을 만들어 나르는 일이다. 철이 바뀔 때면 이따금 봉사자들과 중증장애인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떠나기도 한다. 그가 오랫동안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백운호수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한 회원은 매년 1천만 원 가량을 꾸준히 내놓을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어렵게 사는 해외 동포들, 한국인 정체성 일깨워줘야
그는 해외로도 봉사를 간다. 주로 하얼빈 등 고려인과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당신들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김치 등의 먹거리와 옷 등의 후원물품을 전해주는 것. 필리핀의 소외 지역을 방문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6?26전쟁 때 필리핀에서 군대를 보내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죠. 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가난한 우리가 쌀을 빌려간 적도 있어요. 물론 지금이야 우리가 경제대국이 되어 아쉬울 것 하나 없지만, 당시엔 필리핀의 도움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죠. 어떤 사람들은 '국내에서 봉사하면 되지 뭐 하러 해외까지 나가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저는 이때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필리핀 원주민들은 3모작을 하는데도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그들에게 우리 쌀과 음식, 학용품을 가져다주면 얼싸 안고 좋아한단다. 그렇게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일에 일개 봉사자가 움직이고 있으니 드러내놓고 격려할 만한 일이다. 한편으로 해외봉사는 교포들의 후손들이 한국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의미도 있다. 그들의 후손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면서 "이것이 한국 고유의 음악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봉사로 유명한 사람 나와야 후원자들도 많아져요"
봉사에 돈이 필요 없다는 건 이나영 회장에겐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옷이나 학용품은 기증을 받더라도 직접 구매해야 하는 것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닐 텐데, 그 많은 자금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일까.
"만날 허덕이죠(웃음). 하지만 필요한 금액만큼 결정적인 순간에 어디선가 후원자가 나타나 딱 그 빈곳을 채워주더라고요. 좋은 일을 한다는데 어떻게든 길이 안 열리겠어요? 그렇다고 봉사가 돈으로만 이뤄진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이에요."
장애인복지관에 있는 아이들은 자폐증 때문에 구체적인 혜택을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자신들을 자주 찾는 이를 반겨주는 건 일반인과 똑같다고. 처음 한 해 정도는 모른 척할 수 있지만,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면 마치 가족처럼 봉사자를 따르는 게 바로 이들이다. 이나영 회장은 "봉사의 각도는 다르지만 어떤 방법이든 봉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청송감호소에 교화 봉사를 다닐 때 일이다. 사형이 확정된, 파란 번호가 새겨진 수의를 입은 사형수가 그를 붙잡고 통곡을 했다. "부모의 원수를 갚느라 사람을 죽였는데 감옥에 있는 게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사형수의 말을 들으며 이나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복수극은 복수극으로 끝납니다. 당신이 죽인 사람의 자식은 당신을 평생 원수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마음속에 미움을 지워버리고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세요."
이후 그는 지난날의 과오를 돌이키고 모범수로 분류돼 남은 형기를 성실하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나영 회장은 "봉사를 많이 알려서 유명한 사람도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례가 있어야 뒤따르는 후원자와 봉사자들이 적극 동참한다는 얘기. 봉사가 단순한 개인적인 선행의 의미를 넘어서 대다수 소외계층의 삶을 바꾸는 일이 소명인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다.
"저는 따뜻한 말 한마디, 정성껏 부른 노래 한 소절도 모두 봉사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노력봉사'라고 하는데 상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건 돈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죠."
취재 오혜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