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소식

소통 절벽, 급식체와 급여체

소통 절벽, 급식체와 급여체

by 이규섭 시인 2018.10.05

회색빛 3층 건물의 외형이 독특하다. 모음 ㅏ, ㅡ, ㅣ를 토대로 한글 제자의 원리인 하늘·땅·사람을 형상화했다. 전통 가옥의 처마와 단청의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건물이다. 2014년 10월 9일 개관한 한글박물관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 안에 위치해 있다. 지난 주말 한글날도 다가오고 부근 결혼식장에 갔다가 내친김에 들렀다.
전시품 가운데 훈민정음 해례본과 용비어천가, 월인석보가 돋보인다. 한글과 함께 역사와 가치가 켜켜이 쌓인 문화유산 아닌가. 정조가 네 살 때 외숙모에게 보냈다는 한글 편지는 살갑다. 놀이를 통해 한글의 원리를 깨우치게 하는 ‘한글 놀이터’와 외국인을 위한 ‘한글 배움터’가 색다르다. 아이와 함께 온 엄마 아빠는 가을이 내려앉은 야외 잔디마당에서 노란 햇살을 안고 뒹굴어도 좋겠다.
한글박물관은 한글 관련 전시물로 한정 된 데다 규모가 크지 않아 단조롭고 밋밋하다. 특별기획전시와 체험프로그램을 수시로 운영하여 관람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준다. 10월 14일까지 열리는 ‘나는 몸이로소이다-개화기 한글 해부학 이야기’ 특별기획전을 둘러봤다.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연상시키는 이 전시는 우리 몸과 말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1885년(고종 22)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해부학’ 1∼3권의 내용을 해설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일본 해부학자 이마다 쓰카누(今田束)가 쓴 실용 해부학을 당시 의학생이던 김필순이 번역하고 제중원 의학교 교수 R 에비슨이 교열을 본 뒤 1906년 펴낸 책이다. 개화기 이후 전통의학과 근대 서양의학의 인식 차이와 변화를 통해 새로운 몸의 시대가 열렸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 검시 보고서 ‘검안’ 자료는 과학적 접근을 보여준 사례다. ‘해부학’의 또 다른 성과는 몸에 대한 우리말과 생각을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일상어가 된 이두박근, 세포, 연골, 인대, 신경, 망막 같은 예전에 없던 표현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나는 몸이로소이다’와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 ‘나는 별순검이로소이다’를 한글날 전까지 운영한다. 개화기 탐정이 되어 기획전시실 곳곳을 누비며 가상의 살인사건에 얽힌 비밀을 풀어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말들을 알아보는 초등학생 대상 놀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하지만 정작 우리는 한글을 파괴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법과 뜻을 무시한 은어가 난무하고, 줄임말을 쓰다 못해 자음으로 소통한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는 신조어로 시청자 눈높이를 맞추며 언어 파괴를 부추긴다. ‘아제 개그’ 테스트를 하듯 ‘급식체’ 문제 맞히기 게임에 ‘급식체 특강’ 코너까지 등장했다.
‘급식체’는 급식을 먹는 10대들이 자주 쓰는 은어를 뜻한다. 급식체와 상반된 은어는 ‘급여체’로 월급쟁이 기성세대들이 주로 쓰는 은어다. 급식체와 급여체 세대 간 언어의 간극은 너무 커 소통이 안 된다. 이민족도 아닌데 우리 말글 파괴의 심각한 후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