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소식

서로 다르게 남는 기억

서로 다르게 남는 기억

by 한희철 목사 2018.05.09

오래전 강원도에 살던 시절, 가재와 관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인지라 서재에 앉아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같이 온 두 아들은 작은 어항 속을 신기한 눈빛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어항 안에는 그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온 아이들에겐 어항 속을 기어 다니는 가재가 더없이 신기했나 봅니다.
“우리 가재 잡으러 갈까?” 아이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이야기를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가재를 잡을 수가 있어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예전에는 어디나 흔했던 가재가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가재는 물이 오염되지 않은 1급수에서만 살 수가 있는데, 갈수록 맑은 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신이 난 아이들과 함께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자연 속에 있을 때가 가장 밝고 신이 나는 것 같습니다. 뛸 듯이 산을 오르던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가재를 산에서 잡아요?” 아이들의 질문이 엉뚱하고 재미있어 그럼 어디서 잡느냐고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우린 가게에서 뽑기를 해요.” 인형 뽑기를 하듯 동전을 넣고 살아있는 가재를 뽑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는 계곡엔 겨우내 쌓였던 눈과 얼음이 녹아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재를 잡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차갑고 맑은 물에 손을 넣어 돌멩이를 들추고, 뒷걸음질을 치는 가재를 잡느라 손가락이 물리고, 그러다 용기를 내어 마침내 가재를 잡고, 그날 계곡엔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산에서 내려오기 전 잡았던 가재는 모두 물속에 놓아주었습니다.
가재와 관련된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도 몇몇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함께 온 한 아이를 보는 순간 문득 가재 생각이 났습니다. 마침 비가 온 끝이어서 집 바로 옆 도랑엔 물이 흘렀고, 혹시나 싶어 찾아보았더니 작은 가재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에게 보여주며 가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가져도 되는지를 물었고, 가재를 건네자 얼른 페트병에 물을 채운 뒤 가재를 넣었습니다. 아이는 병을 들고 다니며 좋아라 했습니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 이제는 가재를 놓아주면 좋겠다고 하자 아이는 싫다고 했습니다. 서울까지 가면 가재가 죽을 거라 했지만 “죽어도 괜찮아요.” 하면서 병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뚜껑이 닫힌 플라스틱 병 속에 든 작은 가재는 필시 얼마를 못 견디고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가재를 계곡에 놓아준 아이들의 기억 속 가재들은 맑은 물 돌멩이 밑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겠지요. 고집을 부렸던 아이의 기억 속엔 죽은 가재로 인한 우울한 기억이 남지 않았을까요? 작은 생명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기억은 서로 다르게 남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