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비등점

비등점

by 김민정 박사 2020.04.06

밑둥 아래 잔뿌리가/ 근질거려 움찔대자
나무는 살을 열어/ 꽃눈 가만 내어 민다
우듬지/ 이마가 훤한/ 은사시의 이른 봄날

더운 삶의 질량감을/ 켜켜이 앉히느라
덧쌓인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도
오늘이,/ 어제와 내일/ 그 경계를 끓고 있다
- 졸시, 「비등점」전문

산마다 진달래꽃으로 울긋불긋, 그리고 유채화와 개나리로 노랗게 물들어 있다. 봄의 색상이 아름답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 무더기 꽃처럼 아름답다. 이맘때가 되면 고향의 봄도 새롭게 생각난다. 냇가의 버들개지와 물오른 미루나무 껍질을 비틀어 풀피리를 만들어 친구들과 불곤 했었다. 풀피리를 불면 뱀이 온다고 어른들이 말렸던 기억도 난다. 냉이와 달래를 캐고 쑥과 산나물을 뜯는다고 산과들을 누비며 다니던 어린 시절,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밭에서 달래와 냉이를 캐고, 밭 언저리에선 쑥을 뜯으며 봄을 만끽했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찔레나무에 가서 새로 올라온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까서 먹으며 그 달착지근한 맛을 음미하곤 했다. 찔레는 굵은 순이 씹을 것이 많아 좋았다. 찔레가시에 찔리기도 하면서 찔레를 꺾어다 놓고 굵은 것은 아끼며 제일 나중에 먹기도 했다. 또 칡순이 나는 곳을 다니며 칡을 캐기도 했지만, 어린 우리들은 큰 뿌리는 캐지 못하고, 우리의 힘으로 캘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캐서 먹곤 했다. 칡뿌리에는 탄수화물이 많아 그것을 씹어 단물은 다 빨아먹고, 질긴 줄기는 뱉어내곤 했다. 그렇게 먹다가 보면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 향긋한 봄내음은 내 어린 날의 후각을 마냥 행복하게 했었다. 또 아버지가 가끔씩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가져다주는 진달래꽃과 송구는 얼마나 향기롭고 달콤했는지 지금도 자주 생각이 나곤 한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산골에서 아이들은 그런 것을 간식으로 즐겼었다.
진달래꽃이 예쁘게 핀 곳에는 문둥이들이 숨어 있다가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하여 아이들은 산에 진달래가 예쁘게 피어 있어도 무서워서 보러 가거나 꺾으러 가거나 하지 못했다. 물론 동네 야산에선 많이 보고 즐겼지만 조금 먼 산은 그랬다. 그렇게 오는 봄을 맞으며 지내다 보면 어느새 녹음이 우거지고 신작로의 미루나무도 파랗게 잎이 푸르러지곤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성내천에도 벚꽃이 활짝 피고 개나리가 피어 노랑과 분홍의 조화가 아름답다. 딸아이들이 산책을 졸랐지만, 딸들만 보내고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꽃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아서다.
삼십년이 넘는 교직생활 중 처음으로 개학도 아니고 방학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학교에 나와 아이들도 없는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근무하곤 한다. 학교 화단에는 보아주는 이도 없는 매화가 예쁘게 피었다 지고 목련이 피었다가 하얀 잎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산수유도 피었다가 이미 지고…...
언제 잎이 났는지 파랗게 자라 풀꽃을 피우고 있는 화단의 풀들을 바라보며 작년에 열심히 꽃씨를 받아놓은 해바라기씨와 나팔꽃씨를 심기도 했다. 제 때에 씨를 부려야만 제 때에 잎이 나고 자라 제 때에 꽃을 피울 것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데, 올 봄은 그 모든 것에서 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학생들의 온라인학습을 준비하면서 교정에 휘날리는 벚꽃을 바라본다. 어서 평온한 일상이 돌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