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짐이나 되는 옷의 무게
한 짐이나 되는 옷의 무게
by 권영상 작가 2019.12.19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다. 바깥일을 보고 돌아올 때마다 고역스런 일이 하나 생겼다. 입고 나간 옷을 벗는 일이다. 성가신 일 중에 성가신 일이 됐다. 목도리를 벗는다. 점퍼를 벗는다. 껴입은 조끼를 벗는다. 조끼 안에 입은 폴라티를 벗어낸다. 폴라티 안에 입은 러닝셔츠를 벗고 간편한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이뿐인가. 바지 허리띠를 뽑아낸다. 바지를 벗자면 침대나 의자에 걸터앉아 바짓가랑이가 좁은 바지를 두 손으로 힘주어 뽑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양말을 벗는다. 그러고 나서 보면 쌓아놓은 옷이 가관이다.
“한 짐이네!”
하고 놀라 소리친다.
겨울마다 겪는 일이다. 바깥에 나갈 때마다 옷을 겹겹이 입기 때문이다. 지금은 옷이 가벼워 많이 입어도 그리 힘든 줄 모르지만 지난 시절만 해도 옷 무게가 한 짐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그렇게 무거운 옷을 입고 먼 거리를 출퇴근했다.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니 어쩌면 하루 종일 옷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다.
그 ‘한 짐’인 옷의 무게가 굳이 삶을 짓누르던 고단한 무게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 무렵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는 이 말고도 많았다. 이불이 있었다. 솜이불. 이불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솜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솜이불은 적잖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잠이 안 올 때나 몸이 아플 때 몸을 짓누르던 이불의 무게를 느끼곤 했다. 그 시절엔 난방도 안 됐는데 대개 이불을 걷어차며 잤다. 이불의 무게 때문이겠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불의 이 무게를 소중히 여기셨다. 적당히 우리 몸을 눌러주는 무게 덕분에 보온이 되고, 잠이 쉽게 오고, 깊게 숙면할 수 있다면서 이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누구나 이만한 무게의 힘으로 살아간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겨내야 할 무게는 그 말고도 또 있었다. 밥그릇이었다. 당시의 겨울철 밥그릇은 대개 놋주발이었다. 수북이 담은 밥도 밥이지만 그걸 담아내는 놋주발 역시 무거웠다. 그때 우리는 놋주발이며 놋수저의 무게를 아침저녁으로 느끼거나 그것을 감당하며 살았다.
물론 그 시절, 옷이며 밥그릇이 무거웠던 건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무게를 삶을 살아내는 힘으로 받아들이셨다. 그 얼마간의 무게의 힘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나간다는.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이란 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이치 때문인 듯하다. 그러기에 웬만한 일은 견뎌내야 하는데, 그 힘을 일상의 이런 무게에서 찾으신 거다.
그 시절엔 그랬다. 마을에 우뚝 선 바위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마을의 화마를 누른다거나 삿된 욕망을 누른다고 했고, 마을 험한 산이나 숲이나 거목 또한 그런 관점으로 해석했다. 어찌 보면 원시적이다. 이제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인내나 욕망이 너무 가볍게 노출되고 있다. 노출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가벼움이 미덕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집에 계셔서, 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집이 무게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건 구시대적 사고가 되어버렸다.
한 짐이나 되는 옷을 벗으면서 나를 생각한다. 이 한 짐의 옷의 무게가 나를 여기까지 잘 데려왔다. 일탈하려는 나를 누르고, 자꾸 가벼워지는 나의 경망함을 눌러준 덕분이다. 벗어놓은 옷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듯 제자리에 건다.
“한 짐이네!”
하고 놀라 소리친다.
겨울마다 겪는 일이다. 바깥에 나갈 때마다 옷을 겹겹이 입기 때문이다. 지금은 옷이 가벼워 많이 입어도 그리 힘든 줄 모르지만 지난 시절만 해도 옷 무게가 한 짐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그렇게 무거운 옷을 입고 먼 거리를 출퇴근했다.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니 어쩌면 하루 종일 옷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다.
그 ‘한 짐’인 옷의 무게가 굳이 삶을 짓누르던 고단한 무게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 무렵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는 이 말고도 많았다. 이불이 있었다. 솜이불. 이불 하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솜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솜이불은 적잖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잠이 안 올 때나 몸이 아플 때 몸을 짓누르던 이불의 무게를 느끼곤 했다. 그 시절엔 난방도 안 됐는데 대개 이불을 걷어차며 잤다. 이불의 무게 때문이겠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불의 이 무게를 소중히 여기셨다. 적당히 우리 몸을 눌러주는 무게 덕분에 보온이 되고, 잠이 쉽게 오고, 깊게 숙면할 수 있다면서 이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누구나 이만한 무게의 힘으로 살아간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겨내야 할 무게는 그 말고도 또 있었다. 밥그릇이었다. 당시의 겨울철 밥그릇은 대개 놋주발이었다. 수북이 담은 밥도 밥이지만 그걸 담아내는 놋주발 역시 무거웠다. 그때 우리는 놋주발이며 놋수저의 무게를 아침저녁으로 느끼거나 그것을 감당하며 살았다.
물론 그 시절, 옷이며 밥그릇이 무거웠던 건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무게를 삶을 살아내는 힘으로 받아들이셨다. 그 얼마간의 무게의 힘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나간다는.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이란 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이치 때문인 듯하다. 그러기에 웬만한 일은 견뎌내야 하는데, 그 힘을 일상의 이런 무게에서 찾으신 거다.
그 시절엔 그랬다. 마을에 우뚝 선 바위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마을의 화마를 누른다거나 삿된 욕망을 누른다고 했고, 마을 험한 산이나 숲이나 거목 또한 그런 관점으로 해석했다. 어찌 보면 원시적이다. 이제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인내나 욕망이 너무 가볍게 노출되고 있다. 노출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가벼움이 미덕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집에 계셔서, 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집이 무게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건 구시대적 사고가 되어버렸다.
한 짐이나 되는 옷을 벗으면서 나를 생각한다. 이 한 짐의 옷의 무게가 나를 여기까지 잘 데려왔다. 일탈하려는 나를 누르고, 자꾸 가벼워지는 나의 경망함을 눌러준 덕분이다. 벗어놓은 옷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듯 제자리에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