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처한 예수와 부처
고난에 처한 예수와 부처
by 정운 스님 2019.10.15
일본 성공회 신부님의 글을 읽었다.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어, 대략 간추려 글을 정리해본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사유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동 지역이지만,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근자에 들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성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성지를 방문한다. 수년 전에 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팔레스타인 출신 신부님이 일본에 왔는데, 그를 만나면서 나의 생각에 전환점이 되었다. 신부님[예루살렘 교구의 주교]이 이런 말을 하였다. ‘여러분들은 성지에 가서 유적 같은 돌들만 보고 가지, 거기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크리스챤과는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성지에 가서 ‘예수의 흔적’, ‘그리스도교의 혼’이 담겨 있다고 돌을 만지고 찬양할 뿐 그곳에서 고난받고 살아가는 동료[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았음을 자각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성지순례를 할 때는 현지의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만들었고, 그들의 교회에 가서 함께 기도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들을 일본에 초대해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나 문제점을 들으면서 분쟁 지역 사람들의 고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글을 읽고 정리하면서 필자도 많은 생각을 하였다. 불교에서는 “ ‘부처’라는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상相에 집착하거나 관념두지 말고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스님 중에 괴팍한 스님이 있었다. 단하 천연(736∼824)인데, 스님은 만행도중, 추운 겨울날 낙동洛東 혜림사慧林寺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잠을 자려니,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천연은 법당에서 목불木佛을 내려 쪼개서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승려들이 예불을 하려고 보니, 불상이 없었다. 마침 부엌에 있던 원주스님이 타다 남은 목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단하 천연이 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이 절 부처님 법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부처님 몸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더군요.”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옵니까?”
“사리도 없는 부처인데, 불 좀 피워서 몸 좀 녹였거늘 무슨 큰 죄라도 됩니까?”
독자들께서 절대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법당의 부처님을 함부로 훼손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수행하는 표본으로 여기고, 자신의 자성에 비추어 해탈할 것을 중시 여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섬기고 존중해줄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서로 합장하며, 인사할 때 ‘성불成佛하세요[부처님 되세요]’하는 것이다. 필자는 신도들에게 법문할 때, 늘 이런 말을 한다.
“법당의 부처님만 공경하며 섬길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남편을 부처님처럼 모시세요.”
반대로 남자 신도들에게도 ‘집에 있는 부인을 부처님처럼 모시라.’고 한다. 성지에 가서 유적만을 보고, 신神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곳의 고통 받는 ‘버림받은 불쌍한 예수’를 만나보는 것도 신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본다. 이 원고를 끝내면서 다시 한번 부탁한다. 단하소불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동 지역이지만,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근자에 들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성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성지를 방문한다. 수년 전에 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팔레스타인 출신 신부님이 일본에 왔는데, 그를 만나면서 나의 생각에 전환점이 되었다. 신부님[예루살렘 교구의 주교]이 이런 말을 하였다. ‘여러분들은 성지에 가서 유적 같은 돌들만 보고 가지, 거기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크리스챤과는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성지에 가서 ‘예수의 흔적’, ‘그리스도교의 혼’이 담겨 있다고 돌을 만지고 찬양할 뿐 그곳에서 고난받고 살아가는 동료[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았음을 자각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성지순례를 할 때는 현지의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만들었고, 그들의 교회에 가서 함께 기도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팔레스타인들을 일본에 초대해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나 문제점을 들으면서 분쟁 지역 사람들의 고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글을 읽고 정리하면서 필자도 많은 생각을 하였다. 불교에서는 “ ‘부처’라는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상相에 집착하거나 관념두지 말고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스님 중에 괴팍한 스님이 있었다. 단하 천연(736∼824)인데, 스님은 만행도중, 추운 겨울날 낙동洛東 혜림사慧林寺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잠을 자려니,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천연은 법당에서 목불木佛을 내려 쪼개서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승려들이 예불을 하려고 보니, 불상이 없었다. 마침 부엌에 있던 원주스님이 타다 남은 목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단하 천연이 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이 절 부처님 법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부처님 몸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더군요.”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옵니까?”
“사리도 없는 부처인데, 불 좀 피워서 몸 좀 녹였거늘 무슨 큰 죄라도 됩니까?”
독자들께서 절대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법당의 부처님을 함부로 훼손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수행하는 표본으로 여기고, 자신의 자성에 비추어 해탈할 것을 중시 여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섬기고 존중해줄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서로 합장하며, 인사할 때 ‘성불成佛하세요[부처님 되세요]’하는 것이다. 필자는 신도들에게 법문할 때, 늘 이런 말을 한다.
“법당의 부처님만 공경하며 섬길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남편을 부처님처럼 모시세요.”
반대로 남자 신도들에게도 ‘집에 있는 부인을 부처님처럼 모시라.’고 한다. 성지에 가서 유적만을 보고, 신神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곳의 고통 받는 ‘버림받은 불쌍한 예수’를 만나보는 것도 신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본다. 이 원고를 끝내면서 다시 한번 부탁한다. 단하소불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