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 밖을 드나드는 갈색별
조롱 밖을 드나드는 갈색별
by 권영상 작가 2019.06.20
십자매를 키운 지 오래됐다.
지금 이 십자매 조롱의 원주인은 호금조다. 호금조는 깃털이 크레파스화처럼 곱고 예쁘다. 무엇보다도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새다. 그런 그에게도 결점이 있다. 부화는 시키지만 부화한 새끼를 키워내는 힘이 없다. 그걸 안 우리는 호금조가 알을 품을 무렵 대리모인 십자매 한 쌍을 호금조 조롱에 넣어줬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호금조 새끼도 어미도 잃고 말았다. 그런 사건 이후 대리모로 온 십자매가 조롱의 주인이 됐다. 금슬과 우애 좋기로 이름난 십자매도 알을 품어 새끼로 키워내는 일은 힘든 모양이었다. 새끼 네 마리 중 세 마리를 잃었다. 홀로 남은 어린 것이 가여워 또래의 갈색별을 분양받았다. 적응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얼굴도 반듯하고, 눈도 또록또록하고, 몸매도 날렵하고 총명해 보였다.
어느 날, 거실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설 때다. 뭔가가 내 코앞을 휙 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그가 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색별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어떻게 나왔지? 당황하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녀석이 다시 휙 내 앞을 지나더니 제 조롱을 꺾어 돌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갈색별의 방향을 트는 비행법에 또 한 번 놀랐다. 대개의 새들이라면 문틀에 앉거나 한 후에 안으로 들어갈 텐데, 갈색별은 달랐다. 모든 것이 한 번에 이루어졌다. 갈색별이 들어간 곳을 살펴보니 거기 조롱 측면에 열려있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닫지 말고 드나들게 그냥 두어요.”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안전하다고 해도 조롱 안은 답답할 테고, 갇혀 살면 바깥세상이 궁금한 건 새도 마찬가지겠다. 갈색별은 어쩌면 그때마다 문을 빠져나와 베란다의 하늘을 날다가 돌아가는지 모른다. 모이가 있고, 안전한 둥지가 있는 조롱 속 말고도 바깥이 궁금했다.
한번 조롱을 나와 본 갈색별은 틈만 나면 날아 나와 베란다 화분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유리창이며 빈 의자를 콕콕콕 쪼아본다. 점점 대범해져서는 바닥에 흩어진 모이를 쪼아 먹는다. 그러다가도 사람 눈과 마주치면 휙 날아올라 보란 듯이 제 조롱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내다본다.
조롱의 작은 문은 늘 열려 있다.
그런데 혈연을 이루는 십자매들은 갈색별과 다르다. 조롱 밖을 드나드는 갈색별과 열려있는 문에 통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 그 문은 열려 있으되 닫힌 문이다. 눈에 보이나 그건 문이 아니라 벽이다. 그들은 조롱 속 세상을 수호한다. 그들이 수호하는 조롱 속에는 질서가 있다. 부모 새와 새끼 새의 위계질서가 그것이다.
십자매는 가정적인 새라 부모새의 통제가 심하다. 몇 해 전, 조롱 청소를 하느라 잠깐 열어놓은 문으로 새끼 한 마리가 날아 나왔다가 내 손에 잡혀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 어미새는 새끼를 수없이 쪼고, 모이통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일종의 징벌을 내렸다.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그들에게 금물이다. 그러나 새끼새도 그런 질서쯤 잘 지켜주면 살기 편한 곳이 또한 조롱 속이다.
내가 낳아 키운 내 자식을 생각한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열린 문을 그게 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자식의 삶을 위한답시고 조롱 속의 안일과 질서만을 강요했던 건 또 아닐까.
지금 이 십자매 조롱의 원주인은 호금조다. 호금조는 깃털이 크레파스화처럼 곱고 예쁘다. 무엇보다도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새다. 그런 그에게도 결점이 있다. 부화는 시키지만 부화한 새끼를 키워내는 힘이 없다. 그걸 안 우리는 호금조가 알을 품을 무렵 대리모인 십자매 한 쌍을 호금조 조롱에 넣어줬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호금조 새끼도 어미도 잃고 말았다. 그런 사건 이후 대리모로 온 십자매가 조롱의 주인이 됐다. 금슬과 우애 좋기로 이름난 십자매도 알을 품어 새끼로 키워내는 일은 힘든 모양이었다. 새끼 네 마리 중 세 마리를 잃었다. 홀로 남은 어린 것이 가여워 또래의 갈색별을 분양받았다. 적응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얼굴도 반듯하고, 눈도 또록또록하고, 몸매도 날렵하고 총명해 보였다.
어느 날, 거실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설 때다. 뭔가가 내 코앞을 휙 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그가 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색별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어떻게 나왔지? 당황하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녀석이 다시 휙 내 앞을 지나더니 제 조롱을 꺾어 돌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갈색별의 방향을 트는 비행법에 또 한 번 놀랐다. 대개의 새들이라면 문틀에 앉거나 한 후에 안으로 들어갈 텐데, 갈색별은 달랐다. 모든 것이 한 번에 이루어졌다. 갈색별이 들어간 곳을 살펴보니 거기 조롱 측면에 열려있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닫지 말고 드나들게 그냥 두어요.”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안전하다고 해도 조롱 안은 답답할 테고, 갇혀 살면 바깥세상이 궁금한 건 새도 마찬가지겠다. 갈색별은 어쩌면 그때마다 문을 빠져나와 베란다의 하늘을 날다가 돌아가는지 모른다. 모이가 있고, 안전한 둥지가 있는 조롱 속 말고도 바깥이 궁금했다.
한번 조롱을 나와 본 갈색별은 틈만 나면 날아 나와 베란다 화분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유리창이며 빈 의자를 콕콕콕 쪼아본다. 점점 대범해져서는 바닥에 흩어진 모이를 쪼아 먹는다. 그러다가도 사람 눈과 마주치면 휙 날아올라 보란 듯이 제 조롱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내다본다.
조롱의 작은 문은 늘 열려 있다.
그런데 혈연을 이루는 십자매들은 갈색별과 다르다. 조롱 밖을 드나드는 갈색별과 열려있는 문에 통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 그 문은 열려 있으되 닫힌 문이다. 눈에 보이나 그건 문이 아니라 벽이다. 그들은 조롱 속 세상을 수호한다. 그들이 수호하는 조롱 속에는 질서가 있다. 부모 새와 새끼 새의 위계질서가 그것이다.
십자매는 가정적인 새라 부모새의 통제가 심하다. 몇 해 전, 조롱 청소를 하느라 잠깐 열어놓은 문으로 새끼 한 마리가 날아 나왔다가 내 손에 잡혀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 어미새는 새끼를 수없이 쪼고, 모이통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일종의 징벌을 내렸다.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그들에게 금물이다. 그러나 새끼새도 그런 질서쯤 잘 지켜주면 살기 편한 곳이 또한 조롱 속이다.
내가 낳아 키운 내 자식을 생각한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열린 문을 그게 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자식의 삶을 위한답시고 조롱 속의 안일과 질서만을 강요했던 건 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