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창밖에 오목눈이 둥지

창밖에 오목눈이 둥지

by 권영상 작가 2019.05.30

풍금이 있는 방 창가에 으름덩굴이 있다. 으름덩굴을 구해 심은지가 벌써 6년이다. 6년 전, 안성에 있는 집에 들어올 때다. 텅 빈 집 둘레에 나무라도 심어보려고 양재꽃시장에 들렀다. 적당한 나이의 모과나무와 배롱나무를 사 들고 돌아설 때였다.
“올해는 으름 먹을 수 있겠네.”
여자 한 분이 남편인 듯한 이의 뒤를 따라가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앞서가는 남자가 대꾸했다. 남자의 손에 철제 지주를 감아 오른 꽤나 굵은 나무 덩굴이 들려있었다. 그게 으름덩굴이라 했다. 으름덩굴이란 말도 으름이 열매라는 말도 그때 처음 알았다. 으름이란 이름에 끌렸는지 나도 한번 심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 들었다.
어디 마땅히 심을 곳도 없으면서 사온 으름덩굴을 창가에 심었다. 창문 위에 박힌 외등 때문이다. 거기다 줄을 매고 덩굴을 올리면 초록 으름 숲도 만들고 으름도 먹고.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어찌 된 연유인지 꽃들이 작은 별처럼 요란히 피어도 바라던 으름은 달리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졌다. 대답은 거기 있었다. 수나무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으름은 암수가 따로 있는 나무였다. 수나무를 사다가 가까운 곳에 심어두면 으름을 맛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수나무를 사들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한 그루만으로도 충분했다. 창문을 타고 오른 덩굴은 외등과 다락방 베란다 난간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데 또 수나무까지 사다니! 으름을 못 먹기 쉽지 집을 으름덩굴 손아귀에 바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으름 열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으름덩굴은 내게 있어 무성한 숲일 뿐이지 결실을 못하는 나무가 되어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덩굴이 성대하게 자라는 것도 어찌 보면 나무가 결실을 못 하기 때문인듯했다.
오늘 점심 무렵이다.
아내가 풍금을 켜보겠다며 그 방 창문을 열더니 이내 살금살금 되돌아 나왔다.
“조기 가 봐. 조기.”
아내가 창문을 타고 오르는 으름덩굴을 가리켰다.
초록 덩굴 숲에 놀랍게도 종지만한 새 둥지가 있었다. 둥지에 앉아 눈을 반들거리며 우리를 보고 있는 새 한 마리. 오목눈이었다. 우리는 얼른 창문을 닫고 돌아왔다.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이 알을 품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환기를 위해 풍금이 있는 방의 창문을 여닫아 왔는데 이제야 사람 눈에 띄었다.
나는 대충 손을 꼽아보았다. 둥지를 틀고 5월 중순에 알을 낳았다면 품는데 보름, 새끼를 키워 날려 보내는 데 보름. 앞으로 20여 일을 참으면 오목눈이의 대사는 끝난다. 으름덩굴이 아무 결실도 못 하는 나무라고 나무랐는데 오목눈이를 데려와 그의 결실을 돕고 있었다.
혼자 안성에 내려와 한 댓새 머물면 밤이 외로울 때가 있는데 당분간은 오목눈이와 함께 산다는 마음에 외로움을 덜 수 있겠다.
지난해에도 초겨울까지 으름덩굴 속에 참새 두 마리가 들어와 살았다. 들판에 비가 내리거나 첫눈이 올 때에 나가보면 덩굴 속에서 재재재 우는 그들 울음소리가 났다. 궂은 날 저들이 피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으름덩굴이 사람 못지않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