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와 염퇴
은퇴와 염퇴
by 한희철 목사 2019.05.22
얼마 전 한 선배로부터 은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공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자신은 은퇴다운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은퇴를 경험하고 있고, 은퇴 후의 삶을 고민하고 있는 터에 은퇴다운 은퇴를 준비한다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는 것일까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선배는 ‘은퇴’의 뜻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은퇴는 ‘숨길 은’(隱)과 ‘물러날 퇴’(退)로 된 말입니다.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다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말 그대로 물러나 숨는 것, 혹은 숨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 은퇴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러난 뒤에도 숨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포곡은사처럼 어설프게 나섬으로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들이 적지 않으니 물러나 숨는다는 은퇴의 뜻은 얼마든지 마음에 담아둘 만한 의미 있는 새김이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경북 영주에 다녀왔습니다.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29개 교회가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29개 교회였지만 실제로는 4개의 시(市)와 6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진 지방이어서, 굉장히 넓은 지역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두 시간 이상을 달려오기도 했으니까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던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퇴계 이황의 흔적과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미덥게 여겨졌습니다. 내가 선 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성실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는 선인 중의 한 사람이 농암 이현보였습니다. 일부러 첩첩산중이라 여겨지는 길을 달려 농암종택에 들렀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농암종택을 찾기 전까지는 농암을 몰랐습니다. ‘어부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떠올랐던 것은 윤선도의 어부가뿐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농암은 그렇게 모르고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542년에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더 높은 자리가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습니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 은퇴식이었습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와 금포를 하사하며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했고,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도 지었습니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를 않으니, 나라에서는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를 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을 했습니다. 염퇴란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퇴와 염퇴, 그 뜻은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서로 잇닿아 있지 싶습니다. 욕심도 미련도 모두 내려놓고 흔쾌히 물러서서 숨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뒷모습인 것이었습니다.
선배는 ‘은퇴’의 뜻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은퇴는 ‘숨길 은’(隱)과 ‘물러날 퇴’(退)로 된 말입니다.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다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말 그대로 물러나 숨는 것, 혹은 숨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 은퇴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러난 뒤에도 숨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포곡은사처럼 어설프게 나섬으로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들이 적지 않으니 물러나 숨는다는 은퇴의 뜻은 얼마든지 마음에 담아둘 만한 의미 있는 새김이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경북 영주에 다녀왔습니다.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29개 교회가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29개 교회였지만 실제로는 4개의 시(市)와 6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진 지방이어서, 굉장히 넓은 지역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두 시간 이상을 달려오기도 했으니까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던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퇴계 이황의 흔적과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미덥게 여겨졌습니다. 내가 선 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성실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는 선인 중의 한 사람이 농암 이현보였습니다. 일부러 첩첩산중이라 여겨지는 길을 달려 농암종택에 들렀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농암종택을 찾기 전까지는 농암을 몰랐습니다. ‘어부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떠올랐던 것은 윤선도의 어부가뿐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농암은 그렇게 모르고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542년에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더 높은 자리가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습니다. 임금과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습니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 은퇴식이었습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와 금포를 하사하며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했고,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도 지었습니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를 않으니, 나라에서는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를 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을 했습니다. 염퇴란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퇴와 염퇴, 그 뜻은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서로 잇닿아 있지 싶습니다. 욕심도 미련도 모두 내려놓고 흔쾌히 물러서서 숨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뒷모습인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