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내가 건너온 기성복 시대

내가 건너온 기성복 시대

by 권영상 작가 2019.01.31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에도 신발은 정히 신었다. 한번 사면 5~6년은 신는다. 신발을 사 신기 어려워 그런 게 아니라 내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기 어려워서였다. 돌이켜보면 1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내 발에 맞는 운동화를 사 신은 기억이 없다. 그 무렵은 기성품 시대라 국민표준 발 크기 외의 신발은 생산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적당한 크기의 운동화를 사서 뒤축을 꺾어 신고 다녔다. 근데 이게 또 선생님들 눈에 불량스러워 보였는지, 걸핏하면 학생과로 불렀고, 그 벌로 화장실 청소를 했다.
암만 내 발의 크기에 맞는 운동화가 없노라고 말해도 그 당시엔 그런 말에 귀 기울이는 풍토가 없었고, 소수자를 이해하려는 문화 자체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매양 학생과에 끌려다니며 똑같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네게 구두를 신게 해주마!”
뜻밖에도 그분들과 전혀 다른 한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담임이었다. 그분은 1미터 81센티인 내 키와 달리 1미터 58센티의 단신이셨다. 그러니까 그분이 내 심정을 이해하셨다. 그분 역시 표준화에 미달된 소수자의 수모와 아픔을 겪으셨던 거다.
그분이 어느 날, 290밀리의 어마어마하게 큰 이탈리아제 구두를 구해오셨다. 당시 아버지는 쌀 두 가마 값의 구두값을 내고 내게 그 구두를 받아주셨다. 내 발을 쏙 담아내는 그 구두야말로 내게는 신이었다. 종교였고, 국가였고, 이념이었고, 반체제였고, 이국문명에 대한 동경이었다.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은 두 종류였다. 그중 한 길이 철길이었다. 당시 동해북부선의 일부가 개통되었는데 강릉 경포대간 철길이었다. 그 철길의 선로가 내가 오가는 길이 되었다. 나는 그 위태로운 선로 위를 걸으며 통학했고, 위태로운 경계를 체험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르고 선로에서 내려섰을 때도 내 구두는 말짱했다.
1980년대 무역개방 이후 세상은 더욱 다채로워졌고, 내 발은 급기야 소수자의 반열에서 벗어나 크고 넉넉한 외국 브랜드의 운동화와 구두의 세례를 받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지만 신발을 정히 신는 버릇은 여전했고, 그것은 정히 입는 버릇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내가 입은 옷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다들 혀를 끌끌 찼을 거다. 내가 입은 의복이 가여워서. 그도 그럴 것이 기성복 시대엔 구두만이 아니라 옷도 평균 치수만 생산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연실색할 일이다. 내 아랫도리에 맞는 바지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므로 바지색상과 유사한 헝겊을 구해 바짓단을 덧대어 입기 일쑤였다. 와이셔츠는 물론 양복재킷조차도 소맷단을 덧대어 입었다. 그러니 어찌어찌 몸에 맞추어 입으면 그때부터 그 옷은 정히 입었다. 그 무렵엔 짜장면 내기 축구가 번창했지만 나는 신발이나 옷이 닳을 것을 염려하여 직접 참전하기보다 관전의 기쁨 정도나 누렸다.
그런 습관이 왜곡되어 내 옷을 세탁하려 할 때면 지금도 아내는 꼭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세탁을 하면 옷깃이나 단의 실밥이 다 풀려날 것 같고 옷이 가진 모양이 망가질 것 같다. 아내는 그게 불만이다. 냄새 나는 옷을 입고 다니며 흉잡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게 구두를 신게 해주신 선생님께서도 작은 치수의 옷이나 구두를 지금은 쉽게 구하여 쓰시며 노후를 보내고 계시겠다. 그분이나 나나 소수자의 시대를 살았다. 그 덕분에 소수자가 겪는 아픔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할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