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삶의 주름살 펴졌으면

삶의 주름살 펴졌으면

by 이규섭 시인 2019.01.04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평소 초저녁잠이 심한데도 잠은 저만치 뒷걸음질 쳤다. 자정을 알리는 거실의 뻐꾸기시계가 한밤의 정적을 흔든다. 기다리는 시간은 늘 느린 걸음으로 온다. 기다림 끝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린다. 잽싸게 터치하여 받는다. 아내의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출산했어요.” “산모와 아이는?” “모두 건강하데요...” “분만 시간은?” “0시 03분이래요“
첫 손자가 태어났음을 짧은 대화로 확인하며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오매불망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나뿐인 아들은 서른 살 턱걸이로 결혼했고, 3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2년이 가까워도 며느리가 임신한 기미가 없다. 구닥다리 시부모 소리 들을까봐 묻지도 못하고 눈치만 봤다. 2년 넘어 들어선 첫 아기는 자연유산 됐다. 안타까움과 서운함, 아쉬움과 미안함을 침묵 속에 묻었다.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를 쉬게 했더니 아기가 들어섰다. 집에서 가까운 산부인과에 입원하여 순산했으니 기쁘고 흐뭇하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됐다. 들뜬 기분에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덩치 큰 돼지가 방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온다. 강보에 싸인 손자를 밟으면 어쩌나 신경이 곤두선다. 돼지가 손자를 피해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확인하다 눈을 번쩍 떴다. 꿈이다. 돼지꿈이어서 기분은 좋다.
돼지꿈은 용꿈과 함께 길몽의 쌍벽이라고 전해져 온다. 용은 권력의 상징이고, 돼지꿈은 길조와 행운을 뜻한다. ‘돼지꿈은 이왕이면 크면 좋고, 수컷보다는 암컷, 새끼 수가 많을수록 재물의 크기도 커진다’는 게 꿈 연구가의 풀이다. 손자가 훌쩍 자라 3월이면 초등학생이 된다. 유난히 할아버지를 좋아하며 따른다. 손자는 행복 바이러스다.
새해 첫날 이른 시각 ‘소망풍선 날리기 해돋이 축제’ 행사장으로 향한다.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매봉산이다. 예년과 달리 타원형 오색 풍선이 아니라 친환경 별★풍선을 나눠준다. 들머리에 소망기원문 게시대와 쪽지를 설치해 놓았다. 풍선에 달던 것을 바꿨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세요’ ‘입학하는 손자 튼튼하게 자라고,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쪽지에 소망을 적어 걸었다. 산 능선엔 소망풍선을 든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08시 03분, 산 능선을 붉게 물들이며 황금 돼지해의 첫 태양이 해맑게 이마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구름과 숨바꼭질한다.
기해년(己亥年)은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황금돼지해. 돼지는 동전 같은 양면성을 지닌 동물이다. 신통력을 갖춘 신성한 동물로 제의의 희생으로 쓰일 뿐 아니라 더러움, 게으름, 탐욕의 동물로 폄훼되기도 한다. 돼지는 재물과 다산의 상징이다. 요즘도 고사 때나 시산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돼지머리다. 돼지 코와 입에 돈을 돌돌 말아 꼽는 걸 보면 재물을 불러들이는 동물임엔 틀림없다. 잘 먹고 잘 자라며 한 배에 새끼 여러 마리를 낳는다. 돼지 돈(豚)은 돈(Money)과 발음이 같고 살림을 불려 주는 가축이다. 황금돼지해에 모두가 삶의 주름살 펴지며 환하게 웃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