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얄밉다

얄밉다

by 한희철 목사 2018.10.10

단어 하나가 주는 생각의 결이나 느낌은 의외로 민감하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남자를 만나고 온 여자에게 “어땠어?” 물었을 때, “싫진 않았어.” 하면 ‘싫다’라는 말을 내세운 것과는 달리 뭔가 긍정적인 느낌을 가졌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랜만에 만난 외손녀가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는 노래를 마친 외손녀를 끌어안고서 “아휴, 미운 내 새끼!” 하면서 등을 두드려 줍니다. 미운 내 새끼라는 말은 밉다는 것이 아니라 더없이 예쁘다는 뜻임을 꽃처럼 환한 할머니의 웃음은 말해줍니다.
‘밉다’와 ‘얄밉다’는 말은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입니다. 하긴 사전을 찾아보면 ‘얄밉다’는 말은 ‘말과 행동이 거슬리고 밉다.’로 풀이하고, ‘밉다’라는 말은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거슬린다.’로 풉니다. 사전에 적힌 내용으로 보자면 ‘밉다’와 ‘얄밉다’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전의 풀이와는 달리 ‘밉다’와 ‘얄밉다’는 말은 느낌이 다르게 전해집니다. 우리말에 ‘얄’이라는 접두사가 들어가면 그 뜻이 슬쩍 새롭게 변형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산별곡의 후렴구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안에도 ‘얄’이라는 음이 반복되는데, 그 말 안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흥 같기도 하고 회한 같기도 한 감흥이 전해집니다.
‘얄개’ 하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아주 밉지는 않은 장난꾸러기가 떠오릅니다. ‘얄궂다’는 말도 묘합니다. ‘얄궂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궂다’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줍니다. ‘궂다’는 말은 ‘궂은 날씨’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안 좋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얄궂다’는 말은 그가 하는 행동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부정적이지 않은 여지를 남깁니다.
이렇듯 ‘얄’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본래 가지고 있는 뜻에 살짝 긍정적인 의미가 보태집니다. 부정적이지만 완전히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과 긍정의 느낌을 아울러 전해주는, 음 하나가 보태져서 반어법 역할을 하니 우리말의 쓰임새가 놀랍다 싶습니다.
‘얄밉다’는 말 속엔 그냥 미운 감정만 담긴 것이 아니어서 깜찍한 무엇인가가 느껴집니다. 뭔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어서 마냥 미워할 수가 없는, 일종의 부러움 같은 감정이 전해집니다.
이렇듯 ‘얄밉다’는 말은 길게 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번 남북정상이 백두산 장군봉과 천지를 오가는 케이블카를 탔을 때, 리 여사가 문 대통령에게 “정말 얄밉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김 위원장은 숨을 고르며 문 대통령에게 “하나도 숨차 안 하신다.”고 하자 문 대통령은 “네. 뭐, 아직 이 정도는…”이라 대답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정말 얄밉다” 했다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만나며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말보다도 “얄밉다”는 말 속에 화해를 향한 마음이 오롯이 담긴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