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욱하는 성격, 분노로 표출

욱하는 성격, 분노로 표출

by 이규섭 시인 2018.08.31

은행 대출 창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현금 출납 창구와는 달리 상담이 길어져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표정이 어둡고 심각해 보이면 대출을 받으러 온 고객, 밝으면 재테크 상담 고객일 것이라 지레짐작 해보며 지루함을 달랜다. 전광판에 대기번호가 뜬다. 젊은 행원의 하얀 와이셔츠가 눈길을 끈다. 산업화 시절 은행원은 하이칼라의 대명사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용무는 신용대출. 정확하게는 통장자동대출 재 약정이다. 통장자동대출은 월급쟁이들이 급할 때 마이너스 한도액까지 쓸 수 있는 유용한 제도다. 담보 없는 신용 대출인 만큼 고정 수입이 많을수록 대출 한도가 높다.
직장을 그만둔 세월이 길어 대출 한도가 줄어들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줄어도 너무 큰 폭으로 줄었다. 사회의 뒷방 신세가 된 게 실감 난다. 갑자기 돈 쓸 일이 생기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정도를 기대했다. 자선기관이 아닌 은행 입장에선 손실을 보전할 담보나 신용을 뒷받침할 소득원이 확보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소득을 담보할 수 있는 증빙서가 있으면 떼 오라고 한다. 강의료와 원고료 등 국세청의 소득금액증명은 인터넷을 통해 발급받으니 수월한 편이다. 강사나 필자 위촉증명서와 원천징수 영수증을 발급받으려면 해당 기관 담당자에게 부탁해야 한다. 부탁하는 사람이나 부탁받는 사람 모두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어렵게 보완 서류를 준비하여 은행 창구를 다시 찾았다. 서류를 검토하던 담당 행원은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없다”는 대답이다. 황당하고 허탈하다. “대출 한도가 늘어날 가망이 없으면 아예 보완 서류를 요구하지 말고 규정대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졌다. ‘희망 고문’처럼 느껴져 기분이 땡감 씹은 듯 떫다. 씁쓸하게 은행을 나서며 노인의 분노가 왜 치솟는지 이해가 간다.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 마을버스에서 생긴 일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승차하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승차카드를 주섬주섬 뒤지는 데 한참 걸린다. 뒤따르는 승객들이 어정쩡하게 서서 기다린다. 운전기사가 “빨리 찍으세요” 채근하자 “지금 꺼내고 있잖아” 큰 소리로 응수한다. 노인은 거동이 불편하니 동작이 둔하고 운전기사는 승객이 기다리니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승객 한 분이 “종이 한 장 차이의 인식”이라며 어색한 분위기를 중재한다. 노인의 분노는 작은 일에도 폭발성이 강하다.
노인 범죄 대부분은 욱하는 성격에 분노를 삭이지 못해 일어난다. 최근 70대 노인의 엽총난사사건도 무시당한다는 불만이 폭발했다. 과거 노인 범죄는 생계형 범죄거나 경범죄였으나 갈수록 강력 범죄로 변하는 추세다. 노인들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으로 눈총을 받는다. 노인들의 수명은 길어지고 사회적 고립은 깊어진다. 소외되고 무시당한다는 인식에서 분노 조절을 못하고 욱하는 성격을 표출한다. 노인들을 우대하거나 특별히 배려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노인이라 폄훼하거나 홀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