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 세차해 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세차해 보겠습니다
by 권영상 작가 2018.08.16
폭염이 무섭다. 촌놈 근성이 있어 웬만한 여름쯤 잘 참는데 선풍기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밥 먹을 때도 선풍기, 집안일 할 때도, 잠잘 때도 선풍기 바람에 매달려 산다. 선풍기 없이는 아무 생각도 못 하겠다.
폭염이 공포스러운 건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비 소식도 장마 소식도 끊긴 지 오래다. 어디쯤 가을이 온다는 소식도 없다. 오직 폭염의 기세뿐이다. 전에 없이 장맛비가 그립다. 남태평양은 뭘 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태풍 하나 만들어 올려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애간장을 타게 한다. 기대했던 태풍 ‘야기’도 ‘리피’도 우리나라를 비켜갔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찾는 게 기상예보 기사다. 반가운 비 소식보다는 그칠 줄 모르는 폭염과 열대야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그 기사 밑에 내 눈을 당기는 댓글 하나.
‘그럼, 제가 오늘 세차를 해 보겠습니다.’
나를 웃게 만든다. 통 세차라곤 안 하던 때에 간만에 세차를 하면 꼭 그날은 비가 왔다. 그런 지난날의 경험이 내게도 있다. 그 어느 한탄과 비탄에 잠긴 긴 댓글보다 이 한 줄의 댓글이 비 소식만큼 한순간 내 몸을 살아나게 한다. 행복한 유머다. 제법 그럴싸한 말에 잠시 속아주는 일은 즐겁다. 그도 나처럼 폭염에 시달릴 테지만 오히려 여유롭다. 타인의 한숨을 웃음으로 바꾸어낼 줄 아는 그는 누굴까.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차를 몰아 안성으로 내려갔다. 나보다 더 비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텃밭에 조금 조금씩 심어놓은 것들이다. 한 주일 전에 심어놓은 어린 파 모종은 끝순이 말라간다. 제법 자라던 토란잎도 낙엽처럼 말라 부스러진다. 토마토는 뜨거운 햇빛에 데어 붉다 못해 하얗다. 고추는 채 크지도 못하고 쭈그러든다. 제일 심한 건 꽃들이다. 해바라기는 불에 탄 것처럼 시커멓고, 메리골드도 샐비어도 대궁이의 반은 바싹 말라있다. 그나마 살아 있는 건 참나리 몇 송이와 칸나다.
도시의 폭염은 시골과 달리 견딜 만하다. 나 하나쯤 선풍기나 에어컨 찬바람 그늘에 들어서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골은 아니다. 물기 없는 밭에서 폭염에 헉헉대는 것들이 빤히 보인다. 눈에 보이는데 차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해 질 녘에 호스를 들고 물을 주고 있을 때다.
“주민 여러분, 식수가 부족해질 우려가 있사오니 작물에 물을 주는 일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민 여러분.”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목 쇤 이장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한 번, 마을방송은 그렇게 그쳤다. 늘 있어온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이장님도 오랍뜰에 말라가는 것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다. 나만 살겠다며 이런 위기에서 고개를 돌릴 매정한 사람은 없다.
나는 간단히 물을 주고 호스를 접었다.
한밤중에 뜰 마당에 나갔다. 간신히 목을 축여준 물에 살아나는 작물들 소리가 난다. 푸슥푸슥 잎 펴지는 소리, 그리고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울음소리. 가을 전령이 뜰 마당까지 와 있다. 요 가느다란 울음 한 줄이 지쳐가는 나를 살려낸다. 좀 참으면 분명 가을이 오겠다.
폭염이 공포스러운 건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비 소식도 장마 소식도 끊긴 지 오래다. 어디쯤 가을이 온다는 소식도 없다. 오직 폭염의 기세뿐이다. 전에 없이 장맛비가 그립다. 남태평양은 뭘 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태풍 하나 만들어 올려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애간장을 타게 한다. 기대했던 태풍 ‘야기’도 ‘리피’도 우리나라를 비켜갔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찾는 게 기상예보 기사다. 반가운 비 소식보다는 그칠 줄 모르는 폭염과 열대야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그 기사 밑에 내 눈을 당기는 댓글 하나.
‘그럼, 제가 오늘 세차를 해 보겠습니다.’
나를 웃게 만든다. 통 세차라곤 안 하던 때에 간만에 세차를 하면 꼭 그날은 비가 왔다. 그런 지난날의 경험이 내게도 있다. 그 어느 한탄과 비탄에 잠긴 긴 댓글보다 이 한 줄의 댓글이 비 소식만큼 한순간 내 몸을 살아나게 한다. 행복한 유머다. 제법 그럴싸한 말에 잠시 속아주는 일은 즐겁다. 그도 나처럼 폭염에 시달릴 테지만 오히려 여유롭다. 타인의 한숨을 웃음으로 바꾸어낼 줄 아는 그는 누굴까.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차를 몰아 안성으로 내려갔다. 나보다 더 비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텃밭에 조금 조금씩 심어놓은 것들이다. 한 주일 전에 심어놓은 어린 파 모종은 끝순이 말라간다. 제법 자라던 토란잎도 낙엽처럼 말라 부스러진다. 토마토는 뜨거운 햇빛에 데어 붉다 못해 하얗다. 고추는 채 크지도 못하고 쭈그러든다. 제일 심한 건 꽃들이다. 해바라기는 불에 탄 것처럼 시커멓고, 메리골드도 샐비어도 대궁이의 반은 바싹 말라있다. 그나마 살아 있는 건 참나리 몇 송이와 칸나다.
도시의 폭염은 시골과 달리 견딜 만하다. 나 하나쯤 선풍기나 에어컨 찬바람 그늘에 들어서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골은 아니다. 물기 없는 밭에서 폭염에 헉헉대는 것들이 빤히 보인다. 눈에 보이는데 차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해 질 녘에 호스를 들고 물을 주고 있을 때다.
“주민 여러분, 식수가 부족해질 우려가 있사오니 작물에 물을 주는 일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민 여러분.”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목 쇤 이장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한 번, 마을방송은 그렇게 그쳤다. 늘 있어온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이장님도 오랍뜰에 말라가는 것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다. 나만 살겠다며 이런 위기에서 고개를 돌릴 매정한 사람은 없다.
나는 간단히 물을 주고 호스를 접었다.
한밤중에 뜰 마당에 나갔다. 간신히 목을 축여준 물에 살아나는 작물들 소리가 난다. 푸슥푸슥 잎 펴지는 소리, 그리고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울음소리. 가을 전령이 뜰 마당까지 와 있다. 요 가느다란 울음 한 줄이 지쳐가는 나를 살려낸다. 좀 참으면 분명 가을이 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