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

by 한희철 목사 2018.05.23

이웃과 약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벽에 붙어 있는 짧은 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악한 자들의 잔인한 만행보다 선한 사람들의 침묵, 그것이 우리의 비극’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하니 충분히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비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겨졌습니다.
그 말을 누가 했을까 싶어 알아보았더니 몇 가지 비슷한 말이 눈에 띕니다. 아인슈타인은 “악한 자들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망할 것이다.”라고 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검색을 하던 중 밀턴 마이어가 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라는 책의 서평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한 사람들의 침묵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이는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학살극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고도로 발전한 기독교 문명 국가였습니다. 음악과 미술과 문학과 철학과 신학은 서양 문명의 꽃이었고, 과학과 기술 또한 유럽의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교육 시스템은 서양식 교육의 본보기였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독일인의 생활은 누구에게라도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 찬란한 문명국가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흔히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범죄를 두고 히틀러가 이끈 나치와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이 벌인 만행으로 돌리고는 합니다. 소수의 미치광이들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언론인 밀턴 마이어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1년간 독일에 거주하면서 나치에 가담했던 평범한 일반인 열 명과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한 뒤 내린 결론을 통해서였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나치에 미쳐서 날뛴 진짜 광신자는 당시 독일 인구 7000만 명 중 100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나머지 6900만 명이었습니다. 100만 명이 저지른 광기의 배후에 바로 6900만 명의 암묵적인 동의와 참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100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 독일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단지 간섭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저자가 만난 ‘나치 친구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솔직하고 진실하게 뉘우치는 대신, 당시 현실이 그랬으며 자신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면서 자신의 비겁과 치부를 합리화했고, 책임을 져야 할 일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악한 이들의 잔인한 만행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입니다. 선한 사람들의 침묵을 악한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에 동조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선한 사람들의 깨어 있는 한 마디가 세상을 지키고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