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행위는 언제고 드러나는 법
악한 행위는 언제고 드러나는 법
by 정운 스님 2018.03.13
근자에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온통 ‘미투’와 관련되어 있다. 인류가 형성된 이래 늘 약자는 강자에게 억압을 받아왔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이 강자라는 점을 악용해 누군가를 지배하고, 배신하는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점이 들 정도이다.
불교에서는 업業[karma]이라는 말이 있다. 업에도 세 가지 업[→3업]이 있다. 몸으로 행동하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선업善業이다. 하지만 신체를 이용해 사람을 해치거나 때리는 것, 입으로 악한 말을 하거나 이간질하는 것, 생각으로 좋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는 것은 나쁜 업[惡業]이다.
혹 사람이 나쁜 악업[행동]을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용서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곧 ‘나쁜 악업을 지은 만큼 그 당사자가 과보를 받는다.’는 진리이다. 이를 업보라고 한다. 곧 행위만큼 과보가 따르는 인과응보이다. 악업으로 지은 업보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업보에 의해 윤회하는 것이다. 곧 현세의 좋은 행동을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이나 경제적 요건을 갖춘 곳에 태어남이요, 그렇지 못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 삶도 과거 자신이 지은 것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업과 윤회 사상이 함께 설명된다.
어느 종교에서도 ‘뿌린 만큼 거두리라[As you sow, as you shall reap].’라는 말이 있다. 불교적인 진리가 아니더라도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원리가 세상의 법칙이다. 봄에 장미 꽃씨를 뿌리면 여름에 장미꽃이 피어나고, 호박 씨앗을 심으면 반드시 호박이 열리고 호박꽃이 핀다.
그런데 나쁜 행동을 했는데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착하게 사는데도 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과응보 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악업으로 인한 과보는 어느 시간, 어느 생에서도 받게 되어 있다. <법구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악인惡人은 반드시 죄를 받는다.”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선한 사람도 재앙이 따른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선인善人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그것을 해도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조그만 악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비록 한 방울 한 방울이 적을지라도 그 물이 고여 큰 항아리를 채우나니, 이 세상의 큰 죄악도 작은 악이 쌓여서 되는 것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경전에 다 들어 있다. 자신의 ‘강자’ㆍ‘절대자’라는 위치를 악용해 약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그녀들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었던 그 업보는 덮여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몰랐던 어리석음을 통탄해야지, 죄가 드러난 것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혹 이런 문제가 아니어도 좋은 것이든 나쁜 죄업이든 언제고 드러나게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업業[karma]이라는 말이 있다. 업에도 세 가지 업[→3업]이 있다. 몸으로 행동하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선업善業이다. 하지만 신체를 이용해 사람을 해치거나 때리는 것, 입으로 악한 말을 하거나 이간질하는 것, 생각으로 좋지 않은 것을 마음에 품는 것은 나쁜 업[惡業]이다.
혹 사람이 나쁜 악업[행동]을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용서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곧 ‘나쁜 악업을 지은 만큼 그 당사자가 과보를 받는다.’는 진리이다. 이를 업보라고 한다. 곧 행위만큼 과보가 따르는 인과응보이다. 악업으로 지은 업보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업보에 의해 윤회하는 것이다. 곧 현세의 좋은 행동을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이나 경제적 요건을 갖춘 곳에 태어남이요, 그렇지 못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 삶도 과거 자신이 지은 것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업과 윤회 사상이 함께 설명된다.
어느 종교에서도 ‘뿌린 만큼 거두리라[As you sow, as you shall reap].’라는 말이 있다. 불교적인 진리가 아니더라도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원리가 세상의 법칙이다. 봄에 장미 꽃씨를 뿌리면 여름에 장미꽃이 피어나고, 호박 씨앗을 심으면 반드시 호박이 열리고 호박꽃이 핀다.
그런데 나쁜 행동을 했는데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착하게 사는데도 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과응보 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악업으로 인한 과보는 어느 시간, 어느 생에서도 받게 되어 있다. <법구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악인惡人은 반드시 죄를 받는다.”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는 선한 사람도 재앙이 따른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선인善人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그것을 해도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조그만 악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비록 한 방울 한 방울이 적을지라도 그 물이 고여 큰 항아리를 채우나니, 이 세상의 큰 죄악도 작은 악이 쌓여서 되는 것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경전에 다 들어 있다. 자신의 ‘강자’ㆍ‘절대자’라는 위치를 악용해 약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그녀들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었던 그 업보는 덮여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몰랐던 어리석음을 통탄해야지, 죄가 드러난 것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혹 이런 문제가 아니어도 좋은 것이든 나쁜 죄업이든 언제고 드러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