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

by 한희철 목사 2018.03.07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시 중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으니 봄이 가깝겠지요, 눈앞에 다가온 봄을 기다리며 ‘꽃’을 되뇌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꽃’은 가만히, 그러나 진지하게 돌아보게 해줍니다.
지난 석 주 동안 저는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부탁받은 일이 있어 포틀랜드와 시카고 등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미국에 있는 동안 다시 한 번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플로리다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19세 용의자가 1시간 넘게 교실 안팎을 오가며 총질을 하여 17명의 학생들이 희생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화재 비상벨을 눌러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린 후 총을 쏴댔다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라기보다는 치밀하게 준비를 한 범행이었다 싶습니다. 마침 그날은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밸런타인데이, 하필이면 그 날 일어난 사건이어서 더욱 아이러니하게 여겨졌습니다.
연일 텔레비전에서는 총기사건을 다루고 있었는데 워낙 총기협회의 입김이 막강하여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많았지만 마침 미국을 방문 중에 벌어진 사건, 과연 미국 사회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제게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담화 때문이었는지 가는 곳마다 관공서에는 성조기가 조기로 걸려 있었습니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고등학교 학생들의 분노와 시위는 물론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호소도 소상하게 보도가 되고 있었습니다.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하여 인상 깊게 다가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메디슨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학 중인 한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였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 모임을 인도하던 사회자는 총기 사건으로 희생을 당한 학생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자고 권했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사회자는 희생자 17명의 학생 이름을 한 명씩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창나이에 꿈을 접은 희생자들의 아픔이 구체적으로 밀려들었습니다. 그 순간, 세월호 희생자들 앞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은 슬픔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