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관통하다 - 허준 묘소에서
오늘을 관통하다 - 허준 묘소에서
by 김민정 박사 2018.01.29
밤보다 더 어두운 절망의 한계를 넘어
고통과 아픔 모두 내 몸처럼 받아 안고
심의心醫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멀었으랴
비무장 지대 안에 호젓하게 누웠지만
한 치의 굽힘 없던 살아 생전 그 용기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오늘을 관통하다
- 졸시, 「오늘을 관통하다」 전문
지난 9월 한국여성시조문학회에서 파주기행을 갔었다. 그날 우리는 민통선 안에 있는 장단 콩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허준 묘소는 6.25 전쟁 이후 방치되다 재미고문서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손좌 쌍분’의 내용을 근거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 끝에 1991년 9월 30일 발견했다. 주변은 온통 지뢰밭이라 군인들이 지뢰를 제거하고 발굴했을 당시 쌍분은 이미 도굴되어 있었다. 다행히 허준의 묘를 증명할 수 있는 마모된 비에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묘소는 부인과 함께 한 쌍분으로 두 기의 문인석과 상석, 훼손이 심한 작은 비석이 있었다. 최근에 허씨 종친회에서 묘소 아래 새로 조성한 큰 비석도 있었다. 이 묘소는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서도 잘 알다시피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관이었고, 의학자이다. 1539년에 태어나 1615년에 사망하였으며 『동의보감』으로 유명하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종1품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이 되었다. 전남 장성에서 용천부사를 지낸 양반가문의 허론과 서녀인 영광김씨 어머니가 허론의 첩이 되어 그 사이에서 서자로 출생했다. 조선시대 서자였던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학문은 의학이었다.
20대 후반 30대 초에 서울까지 그의 명성이 전해지자, 서울 관직에 있던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 의원직에 천거를 부탁했다. 내의원에 출사한 후 어의 양예수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게 되었고, 양예수가 남긴 『의림찰요』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되었다.
1590년에 왕자(후일 광해군)를 치료하고, 그해 12월 광해군의 두창도 치료하여 당상관의 품계를 받자 조정의 신하들은 사간원을 통해 그에게 준 품계를 환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의 의지가 확고해 당상관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허준이 유명하게 된 까닭은 『동의보감』 때문이다. 명의는 많지만 『동의보감』 같은 의서를 남긴 의사는 허준뿐이다.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비추어 보아도 독보적이다. 허준이 57세 때 선조로부터 동의보감 편찬을 명받아 작업을 추진하던 중 1597년 정유재란으로 『동의보감』 편찬이 중단되었다. 1608년 선조의 죽음으로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지만, 광해군은 유배 중이던 허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동의보감』 완성을 부탁했다. 1610년 허준은 71세의 나이로 동의보감 25권 25책을 완성했다.
『동의보감』에는 비싼 약재 대신 당시 일반인도 알 수 있게 우리나라 자생약재 637종을 한글로 적어놓았다.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다.
『동의보감』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085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의학서로는 『동의보감』이 최초다. 그가 자랑스럽다.
고통과 아픔 모두 내 몸처럼 받아 안고
심의心醫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멀었으랴
비무장 지대 안에 호젓하게 누웠지만
한 치의 굽힘 없던 살아 생전 그 용기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오늘을 관통하다
- 졸시, 「오늘을 관통하다」 전문
지난 9월 한국여성시조문학회에서 파주기행을 갔었다. 그날 우리는 민통선 안에 있는 장단 콩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허준 묘소는 6.25 전쟁 이후 방치되다 재미고문서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손좌 쌍분’의 내용을 근거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 끝에 1991년 9월 30일 발견했다. 주변은 온통 지뢰밭이라 군인들이 지뢰를 제거하고 발굴했을 당시 쌍분은 이미 도굴되어 있었다. 다행히 허준의 묘를 증명할 수 있는 마모된 비에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묘소는 부인과 함께 한 쌍분으로 두 기의 문인석과 상석, 훼손이 심한 작은 비석이 있었다. 최근에 허씨 종친회에서 묘소 아래 새로 조성한 큰 비석도 있었다. 이 묘소는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서도 잘 알다시피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관이었고, 의학자이다. 1539년에 태어나 1615년에 사망하였으며 『동의보감』으로 유명하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종1품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이 되었다. 전남 장성에서 용천부사를 지낸 양반가문의 허론과 서녀인 영광김씨 어머니가 허론의 첩이 되어 그 사이에서 서자로 출생했다. 조선시대 서자였던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학문은 의학이었다.
20대 후반 30대 초에 서울까지 그의 명성이 전해지자, 서울 관직에 있던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 의원직에 천거를 부탁했다. 내의원에 출사한 후 어의 양예수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게 되었고, 양예수가 남긴 『의림찰요』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되었다.
1590년에 왕자(후일 광해군)를 치료하고, 그해 12월 광해군의 두창도 치료하여 당상관의 품계를 받자 조정의 신하들은 사간원을 통해 그에게 준 품계를 환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의 의지가 확고해 당상관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허준이 유명하게 된 까닭은 『동의보감』 때문이다. 명의는 많지만 『동의보감』 같은 의서를 남긴 의사는 허준뿐이다.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비추어 보아도 독보적이다. 허준이 57세 때 선조로부터 동의보감 편찬을 명받아 작업을 추진하던 중 1597년 정유재란으로 『동의보감』 편찬이 중단되었다. 1608년 선조의 죽음으로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지만, 광해군은 유배 중이던 허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동의보감』 완성을 부탁했다. 1610년 허준은 71세의 나이로 동의보감 25권 25책을 완성했다.
『동의보감』에는 비싼 약재 대신 당시 일반인도 알 수 있게 우리나라 자생약재 637종을 한글로 적어놓았다.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다.
『동의보감』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085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의학서로는 『동의보감』이 최초다. 그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