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걸어야
편한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걸어야
by 한희철 목사님 2018.01.24
첩첩산골, 오지 중의 오지, 그런데도 1920년대 강원도 홍천에 사는 청년들은 글도 많이 깨쳤고, 영어도 잘 하고, 민족의식이 충만하고, 활동도 어느 곳 못지않게 활발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사람, 한서 남궁억 선생 때문이었습니다.
남궁억 선생은 독립협회의 청년간부였고, 황성신문의 사장을 역임했고, 젊었을 적엔 조선 최초의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교육을 받은 뒤 고종의 영어통역관 역할도 했으며, 해외 방문도 하고, 내부 조사, 칠곡 부사, 성주 목사 등 몇 가지 관직도 역임을 한 개화기의 선각자였습니다.
1910년대 초반에는 배화학당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며 <가정교육> 등 책을 펴내며 활동을 하던 그가, 나이 56세 때 강원도 홍천 모곡리, 일명 보리울로 낙향을 합니다. 왜장의 노복이 되어 울 수 없는 닭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산간유곡에 칩거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남궁억 선생은 보리울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교육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무궁화 꽃을 재배하여 묘목을 전국에 보급한 일은 유명합니다. 일제 측의 조사에 의하면 보리울에서 보급된 무궁화 묘목 수는 7만 주가 된다고 합니다.
남궁억 선생이 보리울에 살 때였습니다. 그가 연희전문 졸업식에 축사를 부탁받았습니다. 홍천에서 서울의 연희전문까지는 120Km가 넘는 거리, 때는 2월 초순이었는데도 그 길을 사흘 내내 걸어서 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자는 제자의 말에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타세” 하면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고 합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내가 우리 집에서 여러분을 보려고 널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을 때 무릎이 묻히는 눈길을 걸어오면서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만 따라 왔습니다. 개울 길에 들어서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길이 아닌 곳으로 발자국이 났으므로 나는 그 자국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 아는 산길이기 때문에 원래의 길을 찾아서 생눈을 뚫고 발자국을 내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내 자국을 따라오도록 하였습니다. 변변치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여러분만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면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국보급 존재입니다. 그러면,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이 옮겨야 할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구하려고 내 고장인 농촌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강자를 도와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해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고 같이 강한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눈을 뚫고 원 길을 찾아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무릎까지 눈이 쌓인 길을 누군가 먼저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내 길에서 벗어나 남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편한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남궁억 선생은 독립협회의 청년간부였고, 황성신문의 사장을 역임했고, 젊었을 적엔 조선 최초의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교육을 받은 뒤 고종의 영어통역관 역할도 했으며, 해외 방문도 하고, 내부 조사, 칠곡 부사, 성주 목사 등 몇 가지 관직도 역임을 한 개화기의 선각자였습니다.
1910년대 초반에는 배화학당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며 <가정교육> 등 책을 펴내며 활동을 하던 그가, 나이 56세 때 강원도 홍천 모곡리, 일명 보리울로 낙향을 합니다. 왜장의 노복이 되어 울 수 없는 닭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산간유곡에 칩거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남궁억 선생은 보리울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교육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무궁화 꽃을 재배하여 묘목을 전국에 보급한 일은 유명합니다. 일제 측의 조사에 의하면 보리울에서 보급된 무궁화 묘목 수는 7만 주가 된다고 합니다.
남궁억 선생이 보리울에 살 때였습니다. 그가 연희전문 졸업식에 축사를 부탁받았습니다. 홍천에서 서울의 연희전문까지는 120Km가 넘는 거리, 때는 2월 초순이었는데도 그 길을 사흘 내내 걸어서 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자는 제자의 말에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타세” 하면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고 합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내가 우리 집에서 여러분을 보려고 널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을 때 무릎이 묻히는 눈길을 걸어오면서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만 따라 왔습니다. 개울 길에 들어서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길이 아닌 곳으로 발자국이 났으므로 나는 그 자국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 아는 산길이기 때문에 원래의 길을 찾아서 생눈을 뚫고 발자국을 내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내 자국을 따라오도록 하였습니다. 변변치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여러분만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면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국보급 존재입니다. 그러면,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이 옮겨야 할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구하려고 내 고장인 농촌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강자를 도와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해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고 같이 강한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눈을 뚫고 원 길을 찾아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길을 걸을 것이니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무릎까지 눈이 쌓인 길을 누군가 먼저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내 길에서 벗어나 남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편한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