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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속 인물과 가상화폐

화폐 속 인물과 가상화폐

by 이규섭 시인 2017.12.15

1,000원 지폐 모델 퇴계 이황과 5,000원의 율곡 이이는 16세기 대표적 지식인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다. 해석과 주장은 달라도 라이벌 관계는 아니다. 이황은 사화가 발생하던 시기에 활약했고, 이이는 붕당정치가 판치던 시절에 서인을 이끌었다.
이이가 20대 때 60대를 바라보는 노학자 이황을 찾아갔다. 이이는 이황의 학문과 인품을 확인하며 시를 지어 소회를 밝혔다. ‘소인이 찾은 뜻은 도를 듣기 위함이니 한나절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지 마소서’ 존경의 뜻을 전했다. 이황은 ‘지금 만난 기쁨을 글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힘써 공부하여 서로 더욱 친해 보세나’ 화답했다. 이황은 진성(眞城) 이씨로 안동 등 경상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뤘다. 이이는 덕수(德水) 이씨로 황해도 개풍이 본관이다.
젊은 시절에 들은 이야기다. 진성 이씨 문중에서 조폐공사 사장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이황은 이이보다 연륜이 앞선 학자다. 진성 이씨 인구도 덕수 이씨보다 많은데, 왜 5,000원보다 낮은 1,000원 화폐 인물로 선정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조폐공사 사장은 ‘이황 선생의 연륜이 이이보다 높고 종친 인구가 많기 때문에 활용 빈도가 5,000원권보다 잦은 1,000원 지폐에 넣었다’고 답변했다니 명쾌하고 재치 있다. 통계청 2000년 자료에 따르면 진성 이씨는 20,890가구에 66,407명, 덕수 이씨는 15,711가구에 50,486명으로 진성 이씨가 많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화폐에 등장한 인물은 이씨에 외자 이름에 혈연이 얽혔다. 이황과 이이, 10,000원 화폐의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 500원 주화의 충무공 이순신은 이이와 같은 본관이다. 50,000원 화폐의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다.
화폐에 인물을 많이 넣는 이유 중 하나가 위조와 변조 방지다. 인물은 얼굴에 나타난 개성이 뚜렷하여 다른 문양에 비해 위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화폐 발행 때 종교의 입김이 거세다. 1972년 최고액권인 10,000원 지폐를 만들 때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를 앞뒷면에 넣기로 확정하고 시제품까지 만들었다. 기독교계에서 ‘불교 문화재를 화폐에 넣는 것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일’이라고 반발하여 발행이 취소됐다. 이듬해 세종대왕이 10,000원 화폐에 등극하게 됐다.
50,000원권 발행 때 100,000원짜리도 발행하려고 공론을 거쳐 김구를 모델로 선정까지 했다. 이념을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각 문중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채택해 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발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요즘 한국에 가상화폐 광풍이 불어 투기와 사기 등 후유증이 우려된다고 한다. 가상화폐 비트코인은 화폐의 기본 기능인 법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투기 열기가 뜨거운 건 사회적 불안감과 도박심리,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쏠림문화 영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폐로 된 화폐를 가질 수 없기에 가상화폐를 보유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 가상화폐 과열을 진정시킬 대책을 서둘러 내놓아야 한다. 장기적으론 화폐의 인물을 바꾸고 보류한 100,000원권 지폐를 발행하여 국면 전환을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