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경륜은 누룩이다

경륜은 누룩이다

by 이규섭 시인 2017.12.08

서울시청 광장 성탄 트리 점등식이 있던 날, 은하수처럼 은은하게 밤하늘을 수놓는 트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 반다비’가 깜찍하고 앙증스러운 표정으로 추억을 찍는 시민들을 반긴다. 청계광장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겨울 추위를 녹일 온정의 손길을 기다린다. 대학생 자원봉사자 한 명이 “사랑을∼”하고 선창하니 여러 명이 “담아주세요” 추임새를 넣는다. 성탄 트리와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세모의 풍경이다. “또 한 해가 가는군” 신음처럼 토해낸다.
올해 첫 송년회는 언론기관 소속 미디어강사 모임이다. 전국 초중고와 도서관 등을 누비며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열강한 분들이다. 먹은 것은 나이뿐인 연장자라 건배사 제의를 받았다. “강사들은 강의 배정을 많이 받고 아이들의 반응이 좋을 때 보람을 느끼듯 모임에는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며 ‘소화제’를 건배사로 외쳤다. 소통과 화합은 사회통합의 핵심 키워드다.
강단에서 아이들에게 2분 스피치로 의사 표현을 시켰듯이 강사들도 2분 스피치로 올 한 해 애로점과 보람을 이야기해달라고 주문했다. 강의가 흥미와 재미 위주로 흐르면 메시지가 부족하고, 의미 부여가 많으면 집중도가 떨어져 산만해진다는 게 공통의 애로점이다.
나는 중학생 학부모와 도서관이 모집한 학부모 대상 뉴스리터러시 강의 사례를 들었다. ‘생각 열기’로 한 주간 기억에 남는 기사를 선정하여 발표하면서 뉴스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다. ‘생각 펼치기’로 주제에 대한 강의를 한 뒤 과제 풀기를 펼친다. ‘생각 나누기’로 공통 관심사인 사교육, 자기주도학습, 아이들 휴대폰 관리 등 주제로 의견을 교환하니 호응도가 높았다. 강사들과 정보를 공유한 소중한 시간이다.
모임에 참석한 60대 후배는 “선배가 참석하니 질서가 잡히고 든든하다”고 듣기 좋게 말하지만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이 들면 의기소침해지기 쉬운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나문희의 수상 소감엔 농익은 경륜이 묻어난다. “어머니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문희의 부처님께 감사드린다”는 사려 깊다.
올해 76세, 쟁쟁한 젊은 배우들을 제치고 데뷔 56년 만에 역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최고령 수상자다운 철학적 사유다. “나의 세상과 타인의 세상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유쾌하게 세상에 전했다”며 “우리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대목은 대립과 갈등을 접고 상생하자는 세상을 향한 울림으로 들린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노인 인구가 유소년보다 많다 보니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다. 세대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각 분야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많아 나문희의 트로피가 더 값지다. 농익은 경륜은 누룩처럼 발효되어 세상에 깊은 맛을 낸다.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다. 나이테에 켜켜이 지혜가 쌓인다. 존경이나 공경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무시하거나 홀대하지 말고 늙음 그대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