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양보의 미덕 실종

양보의 미덕 실종

by 이규섭 시인 2017.11.10

다섯 살 손자와 고궁 나들이를 하려 지하철을 탔다. 뒷집 할아버지도 네 살 손자와 동행했다. 나는 일반석 앞에 서 있고, 뒷집 할아버지는 경로석 부근에 섰다. 손자가 다리 아프다고 칭얼거리다가 내 신발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앞에 앉은 20대 여성과 30대로 보이는 여성은 휴대폰에 시선을 꽂고 미동조차 않는다. 자리 양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지공대사(지하철 공짜 세대) 처지에 돈 내고 일반석에 앉은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20대 여성은 두 정거장 지나 환승역에서 내린다. 손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 옆자리 30대 여성은 다리를 꼬고 있어 신발 끝이 내 바지자락을 스친다. “다리 바로 해 주세요”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 낮은 톤으로 말했다. 옆에 줄곧 서 있던 50대 아주머니는 내 속셈을 눈치챈 듯 쿡쿡 웃는다. 뒷집 손자는 경로석에서 일찍 자리를 차지했다. 어르신이 어린이를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
며칠 뒤 시내버스를 탔다. 복잡하지는 않아도 빈 좌석은 없다. 노약자석엔 아주머니와 20대 청년, 30대 여성이 각각 앉았다. 몇 정거장을 지나도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기가 발동해 20대 청년 좌석 가까이 섰다. 내려다보니 휴대폰 게임에 빠졌다. “여기는 노약자석이다”고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편히 가려다 봉변당할 수도 있으니까. 뒤쪽에 자리가 빈다. 노약자 뒷좌석 승객이 내게 그리로 가라고 알려준다. “서 있으면 건강에 좋으니까” 스스로를 위안하며 버티다가 결국 내가 먼저 내렸다.
나이가 벼슬은 아니라도 예전엔 어른 대접을 받았다. 노약자가 타면 선 듯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학생 좌석 옆에 노약자가 서 있으면 “학생 자리 좀 양보해 드려” 충고 하는 어른도 있었으나 무관심으로 변한 지 오래다. 장유유서는 고리타분한 윤리규범이 됐다. “내 돈 내고 탔으니 앉을 권리가 있다” “양보하고 안 하고는 내 맘이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탓이다. “어른만 힘 드느냐 학업에 지친 학생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보건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10명 가운데 4명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으로부터 양보나 배려를 받은 경험이 없다는 통계도 세태 변화의 반영이다.
지하철 일반석에 임산부 배려석을 만들어 놓았으나 일반인들이 예사로 앉아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앉았다가 임산부가 오면 일어서려고 한다지만 그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임산부석에 일반인이 앉으면 표지가 가려진다. 일부 지하철엔 분홍빛으로 구분해놓았어도 일반인이 앉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일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곰 인형을 놓고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저를 앉고 앉으세요.’ 써 놓았더니 자리를 비워두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도 곰 인형을 안고 앉았다가 내릴 때 맘 편하게 내려놓고 가게 됐다니 다행이다. 양보와 배려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인데, 노약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던 미풍양속이 실종돼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