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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둘레길

덕수궁 둘레길

by 이규섭 시인 2017.09.22

덕수궁 돌담길은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다.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을 허밍으로 흥얼거린다. 노랫말 주인공은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혼자 걸었지만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으니 눈부시다. 연인과 함께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기에 젊은 솔로도 쪽팔리지 않고 혼자 걷기 맘 편한 산책로다.
돌담길에 전시된 그림과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노래에 눈과 귀가 즐겁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페어샵 장터가 열렸다. 돌담길 양편에 노란 파라솔이 해바라기 꽃으로 피었다. 사회적 경제 기업, 장애인 기업, 청년 창업가들의 창의적 착한 상품을 판매한다. 아기자기한 소품, 이 세상에 하나뿐인 수제품들이 다양하다.
돌담길서 정동길로 이어지는 길목은 근현대사의 유적이 많아 발길이 풍요롭다. 느긋하게 둘러보면 혼자라도 쑥스럽지 않다. 정동로터리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은 개신교의 세례가 처음 베풀어졌던 정동제일교회. 왼쪽으로 접어들면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 곧장 가면 이화학당이다.
정동극장을 끼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덕수궁 중명전이 숨은 그림처럼 숨어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다. 담장 너머로 주한미대사관저가 보인다. 주한미대사의 저녁 초대를 받아 들렀던 아득한 기억이 떠오른다. 정동 언덕바지에 일터가 있어 이 길목의 풍경은 눈을 감고도 훤하다. 아관파천의 치욕이 서린 언덕배기 구 러시아공관은 덕수궁의 역사를 굽어본다.
정동로터리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입구 경비초소는 정국의 바로미터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면 어김없이 바리케이트가 설치된다. 휴일이라 오가는 이들이 많다. 58년 만에 추가로 개방된 덕수궁 둘레길 100m를 찾은 사람들이다. 개방된 길의 담장은 낮고 기와는 새로 얹어 고즈넉한 맛은 없다. 100m 끝 지점에 영국대사관 후문이 가로막는다. 황실문양이 새겨진 검은 철 대문 앞에 근위병 두 명이 경비를 선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추가로 개방된 둘레길 끄트머리에 쪽문을 새로 냈다. 대한문으로 입장한 관람객은 이 문으로 나올 수 있어도 이곳에서 들어갈 수는 없다. 덕수궁 돌담길은 전체 길이가 1100m로 그동안 170m가 출입이 통제됐다. 그 가운데 100m 구간은 원래 서울시 소유였다. 영국이 1959년 대사관을 만들면서 무상점유 허가를 받았다.
당시 서울시는 영국대사관 측과 5년 뒤 점유허가 연장 여부를 논의하기로 합의했으나 잊어버렸다. 뒤늦게 확인한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100m 구간을 되돌려 받고 둘레 길을 복원했다. 나머지 70m 구간은 영국대사관 소유로 개방 대상에서 빠졌다.
70m 구간이 막혀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구세군중앙회관을 지나 서울시의회 뒷길을 거쳐 영국대사관 정문이 있는 대한성공회성당까지 걸었다. 3∼4분 걸릴 거리를 15분 정도 돌았다. 서울시는 영국 대사관에 70m 구간을 개방해 달라고 제안했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00m 개방에 60년 가까이 걸렸다. 막힌 70m가 추가 개방되어 온전하게 둘레 길을 둘러볼 날은 언제쯤 이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