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사람은 가도 그리움은 남는다

사람은 가도 그리움은 남는다

by 이규섭 시인 2017.09.08

옥상 물탱크가 한 시대를 마감한다. 서울시는 수돗물 수질 관리를 위해 4층 이하 다가구주택의 소형 물탱크를 연내에 모두 철거하고 직결 급수방식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플라스틱 재질인 물탱크가 햇빛에 노출되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세균이 번식하거나 조류가 생겨 수질이 나빠질 수 있고, 겉보기에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이사 왔을 땐 옥탑방 안에 작은 물탱크가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수돗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낮은 수압을 보완하고 단수에 대비하려 옥상에 노란 물탱크를 설치했다. 단독주택 물탱크는 여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시절 삶의 풍경이었다. 어느 해 여름, 물탱크를 청소하려 물을 뺀 뒤 사다리를 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침전물이 잔뜩 쌓였다. 겨울엔 동파를 방지하려 보온재 은박지를 둘러쳤다. 위생관리는 물론 이래저래 신경 쓰여 철거하고 직결 급수로 바꿨다.
옥상 물탱크를 없앤 뒤 ‘옥상정원’을 꾸몄다. 그늘막을 설치하고 들마루와 탁자를 마련했다. 들통을 활용하거나 커다란 화분을 들여놓고 나무를 심었다. 여러 해에 걸쳐 수종을 바꿨으나 살아남은 나무는 오가피와 엄나무다. 약용나무라 생명력이 역시 강하다. 장미, 목수국, 라일락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봄이면 향기를 뿜는다. 나이와 함께 게으름도 는다. 옥상과 계단의 화분은 60여 개로 물을 주는 것도 만만찮다. 백일홍, 과꽃 등 일년초를 줄이고 매발톱꽃, 금낭화 등 다년초를 늘렸다. 천사의 나팔과 채송화는 씨앗이 떨어져 봄이면 지천으로 새순을 뽑아 올린다.
한때 마당에 심은 머루 넝쿨이 2층 옥상까지 뻗어 올라와 지지대를 설치하고 그물망을 친 뒤 집중 관리했다. 한여름엔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머루가 어린 시절의 아릿한 추억을 머금고 까맣게 익어갔다. 몇 해 동안 머루주를 유리병에 담글 만큼 수확이 풍성했다. 10여 년 지나니 지력이 약해졌는지, 공해에 시달렸는지 시름시름 줄기가 약해지기에 비어 버렸다.
머루넝쿨이 사라진 빈자리에 나팔꽃과 인동초 등 줄기식물을 심다가 올해 처음 식용 박을 심었더니 줄기는 왕성하게 뻗어가는데 달린 박이 영글지 못하고 삭아버린다. 원인이 궁금하다. 꽃보다 고추를 더 신경 써 기른다. 해마다 화분에 열네 그루를 심는데 여름 내내 싱싱한 고추를 따 먹어 입이 호강한다. 이른 봄 고추 모종을 심기 전 화분에 흙을 모두 옥상 바닥에 쏟아붓고 퇴비를 사다 섞은 뒤 다시 담는다. 지력이 다한 건지 올해 고추 농사는 신통찮다. 고추의 허리가 새우처럼 굽고 주름살이 생기며 딱딱해진다. 내년을 기약하며 일찍 고추 대궁을 뽑아버렸다.
가끔 친인척이 오면 옥상 화덕에 숯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즉석에서 풋고추를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방문객이 늘면 좁은 거실보다는 탁 트인 옥상이 제격이다. 옥상정원을 즐겨 찾았던 조카사위가 2년 전 세상을 뜬 뒤 옥상은 꽃 진자리처럼 허전해졌다. 사람은 가도 그리움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