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시대와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by 권영상 작가 2017.07.27
골목길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그들이 하나둘 들어설 때 나는 그것들이 마뜩잖았는데 없어지는 걸 보니 시원하지만은 않다. 나이를 좀 먹은 이들은 프랜차이즈 커피 가게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주된 고객이 젊은 층이라 더욱 그렇다. 그 말고 또 있다면 직접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다. 높은 곳에 설치한 메뉴판의 메뉴를 고개를 쳐들고 읽어야 하는 일 또한 장난이 아니다. 도무지 모르는 메뉴들이다. 에티오피아사다모는 뭐고 더치 아메리치노는 왜 아메리카노가 아니고 아메리치노인지.
나는 언젠가 마셨던 거품 맛 나는 그 커피를 생각하며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돌아와 낭패를 겪은 일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그 쓰디쓴 커피를 받아놓고서야 비로소 카푸치노를 생각해냈다. 나만의 경험일까.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접할 때도 종종 낭패감을 맛본다. 한때 코스프레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이 말은 costume play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장 놀이’ 정도의 뜻이다. 괜히 아픈 척 코스프레를 한다느니 등으로 쓰이는 말이다. 국가 어젠다니 정책 어젠다니, 어쩌구 하는 어젠다 류의 말들, 디지털 통화라는 비트코인, 비트코인도 그쯤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뚱딴지같이 비트코인 채굴방법은 또 뭐고, 비트코인이 화폐라는데 구매방법은 또 뭔가.
이래저래 귀에 익어진 오프 더 레코드, 텔레뱅킹, 디스플레이, 태스크포스, 토플리스트, 제로섬 등의 말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른 이에 비해 나는 좀 느리다. 하지만 케미, 스웨그, 알고리즘, 포켓몬, 인스타그램, 브런치, 프로토콜 등에 대해선 지금도 여전히 무지하다.
오늘 아침 기사에 이런 내용이 떴다.
모 정당 대표가 대통령 초청 모임에서 아무개를 해임시켜 달라는 말을 ‘디스했다’면서 청와대에 자주 와보지 않았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지난 정부 때는 공천 탈락되는 바람에 와보지 못했다는 말끝에 ‘셀프디스’ 했다고 적었다. 디스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요즘 내남없이 디스 타령이다. 아직도 그 말뜻에 긴가민가한 나는 ‘디스’를 사전에서 찾았다. disrespect(무례)의 앞머리만을 쓰는 줄임말이다. 그러니까 그가 대통령에게 무례한 청을 했다는 말이다. 셀프디스도 self-disrespect의 준말로 공천 탈락과 같은 자신의 부끄러운 약점을 스스로 드러냈다는 말인 셈이다. 그 말들이 거기 그 자리에 놓이는 게 적합한지, 그 말들이 기사를 천박하게 만든다, 아니다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식의 논리를 펴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점점 시대와 멀어지고 있다는, 시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는 듯한 불길함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 들면 관심 분야 밖에 것에 대해 무지해진다. 그런가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그 시대와 함께 웃고 울고 소통하며 나란히 가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다. 그런 욕망마저 다 버리고 고고하게 살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는 한 그 시대의 유머와 그 시대에 생산되는 유행어와 스타일을 읽을 줄 아는 감각과 열정이 필요하다.
차츰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분야가 많아질수록 나는 노화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산다는 건 그 시대와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언젠가 마셨던 거품 맛 나는 그 커피를 생각하며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돌아와 낭패를 겪은 일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그 쓰디쓴 커피를 받아놓고서야 비로소 카푸치노를 생각해냈다. 나만의 경험일까.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접할 때도 종종 낭패감을 맛본다. 한때 코스프레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이 말은 costume play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장 놀이’ 정도의 뜻이다. 괜히 아픈 척 코스프레를 한다느니 등으로 쓰이는 말이다. 국가 어젠다니 정책 어젠다니, 어쩌구 하는 어젠다 류의 말들, 디지털 통화라는 비트코인, 비트코인도 그쯤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뚱딴지같이 비트코인 채굴방법은 또 뭐고, 비트코인이 화폐라는데 구매방법은 또 뭔가.
이래저래 귀에 익어진 오프 더 레코드, 텔레뱅킹, 디스플레이, 태스크포스, 토플리스트, 제로섬 등의 말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른 이에 비해 나는 좀 느리다. 하지만 케미, 스웨그, 알고리즘, 포켓몬, 인스타그램, 브런치, 프로토콜 등에 대해선 지금도 여전히 무지하다.
오늘 아침 기사에 이런 내용이 떴다.
모 정당 대표가 대통령 초청 모임에서 아무개를 해임시켜 달라는 말을 ‘디스했다’면서 청와대에 자주 와보지 않았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지난 정부 때는 공천 탈락되는 바람에 와보지 못했다는 말끝에 ‘셀프디스’ 했다고 적었다. 디스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요즘 내남없이 디스 타령이다. 아직도 그 말뜻에 긴가민가한 나는 ‘디스’를 사전에서 찾았다. disrespect(무례)의 앞머리만을 쓰는 줄임말이다. 그러니까 그가 대통령에게 무례한 청을 했다는 말이다. 셀프디스도 self-disrespect의 준말로 공천 탈락과 같은 자신의 부끄러운 약점을 스스로 드러냈다는 말인 셈이다. 그 말들이 거기 그 자리에 놓이는 게 적합한지, 그 말들이 기사를 천박하게 만든다, 아니다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식의 논리를 펴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점점 시대와 멀어지고 있다는, 시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는 듯한 불길함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 들면 관심 분야 밖에 것에 대해 무지해진다. 그런가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그 시대와 함께 웃고 울고 소통하며 나란히 가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다. 그런 욕망마저 다 버리고 고고하게 살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는 한 그 시대의 유머와 그 시대에 생산되는 유행어와 스타일을 읽을 줄 아는 감각과 열정이 필요하다.
차츰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분야가 많아질수록 나는 노화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산다는 건 그 시대와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