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품은 별
삶을 품은 별
by 이규섭 시인 2017.07.14
장맛비가 거세게 내리던 지난 일요일, 언론계 대선배의 부음을 휴대폰을 통해 두 곳에서 받았다. 고인이 몸담았던 경향신문 사우회와 대한언론인회에서다. 다음 날 각 신문의 부음기사를 검색해 봤다. 얼마나 비중 있게 다뤘는지 궁금해서다. 친정인 경향신문이 짧게나마 기사형태로 보도했다. 나머지 언론은 석 줄짜리 단신 부음이다.
향년 86세로 떠난 그 선배는 두 번의 뇌출혈에도 불구하고 두 달 전까지 오비산악회에 참여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열일곱 살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대전신병교육대에서 목총으로 전투훈련을 받고 6.25 최대 격전지 다부동 전투에 투입됐다. 3일만 버티면 선임이 된다는 전쟁터에서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경주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3일 만에 깨어나 의병제대 했다. 6.25 참전을 잊을 수 없다며 휴대전화 끝 번호도 0625를 고수했다. ‘6.25 참전 언론인동우회’ 발족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한때 장안의 학원 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늦은 나이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시론과 명칼럼을 남겼다. 최종 학력은 ‘코오롱등산학교’라고 자랑할 만큼 65세 때 암벽등반에 도전한 승부 근성의 소유자다. 옳다고 주장하면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던 성격이 스스로 수명을 단축한 요인이 아닌가 유추해 본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석 줄짜리 부음기사가 고작이다.
그동안 신문지면은 대폭 늘었으나 부음기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자식의 명망에 얹혀 000의 부친상이라고 하다가 근래 들어 고인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게 변화라면 변화다. 파워 엘리트,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 화제의 인물이어야 그나마 기사화된다.
부음기사가 인색한 요인 중 하나는 젊은 기자들이 한 세대 이상 지난 인사들을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기록이 미흡한 탓도 있다. 1950년대 최고의 대중가수 백설희(白雪姬·1927∼2010)가 타계했을 때 어떤 신문의 가요담당 기자가 부음기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지인인 언론계 선배가 궁금하고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백설희가 누군데요” 반문하더라는 것. “아니 백설희 몰라? 영화배우 황해 부인이잖아. ‘봄날은 간다’ 이런 명곡도 불렀고.” 그렇게 말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백설희 아들이 전영록이야” 하고 알려주었더니 “아, 그러면 전보람의 할머니네요?” 그랬다.
이번엔 물어본 선배가 멍해졌다. “전보람이 누구여?” 그러니까 전보람의 아버지가 전영록이고 어머니는 이미영이란 탤런트, 외삼촌은 개그맨 맹구 이창훈이라며 주욱 읊어 대더라는 칼럼을 읽고 혼자 쿡쿡 웃었다. 사실은 웃을 일이 아니라 서글픈 현상이다.
‘뉴욕타임스’ 부음 섹션은 미국 지식인이라면 관심 있게 읽는 기사다. 부음기사 중독이란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오비추어리(obituary·부음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지 오래다. 화려하게 살다간 사람이 아니라도 열심히 세상을 살다간 사람의 부음기사를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면 아름다운 삶을 품은 별처럼 빛나지 않을까.
향년 86세로 떠난 그 선배는 두 번의 뇌출혈에도 불구하고 두 달 전까지 오비산악회에 참여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열일곱 살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대전신병교육대에서 목총으로 전투훈련을 받고 6.25 최대 격전지 다부동 전투에 투입됐다. 3일만 버티면 선임이 된다는 전쟁터에서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경주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3일 만에 깨어나 의병제대 했다. 6.25 참전을 잊을 수 없다며 휴대전화 끝 번호도 0625를 고수했다. ‘6.25 참전 언론인동우회’ 발족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한때 장안의 학원 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늦은 나이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시론과 명칼럼을 남겼다. 최종 학력은 ‘코오롱등산학교’라고 자랑할 만큼 65세 때 암벽등반에 도전한 승부 근성의 소유자다. 옳다고 주장하면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던 성격이 스스로 수명을 단축한 요인이 아닌가 유추해 본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석 줄짜리 부음기사가 고작이다.
그동안 신문지면은 대폭 늘었으나 부음기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자식의 명망에 얹혀 000의 부친상이라고 하다가 근래 들어 고인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게 변화라면 변화다. 파워 엘리트,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 화제의 인물이어야 그나마 기사화된다.
부음기사가 인색한 요인 중 하나는 젊은 기자들이 한 세대 이상 지난 인사들을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기록이 미흡한 탓도 있다. 1950년대 최고의 대중가수 백설희(白雪姬·1927∼2010)가 타계했을 때 어떤 신문의 가요담당 기자가 부음기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지인인 언론계 선배가 궁금하고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백설희가 누군데요” 반문하더라는 것. “아니 백설희 몰라? 영화배우 황해 부인이잖아. ‘봄날은 간다’ 이런 명곡도 불렀고.” 그렇게 말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백설희 아들이 전영록이야” 하고 알려주었더니 “아, 그러면 전보람의 할머니네요?” 그랬다.
이번엔 물어본 선배가 멍해졌다. “전보람이 누구여?” 그러니까 전보람의 아버지가 전영록이고 어머니는 이미영이란 탤런트, 외삼촌은 개그맨 맹구 이창훈이라며 주욱 읊어 대더라는 칼럼을 읽고 혼자 쿡쿡 웃었다. 사실은 웃을 일이 아니라 서글픈 현상이다.
‘뉴욕타임스’ 부음 섹션은 미국 지식인이라면 관심 있게 읽는 기사다. 부음기사 중독이란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오비추어리(obituary·부음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지 오래다. 화려하게 살다간 사람이 아니라도 열심히 세상을 살다간 사람의 부음기사를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면 아름다운 삶을 품은 별처럼 빛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