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버들이 할머니

버들이 할머니

by 권영상 작가 2017.06.15

마을에 버들이 할머니가 계셨지요. 버들이에서 시집을 오셨다 해 다들 버들이 할머니라 불렀지요. 학교길을 갈 때면 가끔 길에서 그분을 만났지요. 학교로 가는 길은 그분이 그분의 밭으로 가시는 길과 교차하는데 주로 그 지점에서 만났지요.
어느 날, 동무들과 아침 학교길을 가고 있을 때입니다.
저쪽 앞에 버들이 할머니가 길을 건너지 않고 서 계셨습니다. “뛰자!” 그때 우리 중의 머리가 굵은 누군가가 소리쳤지요. 우리는 그를 따라 뛰었고, 할머니 앞을 지나가며 아침 인사를 드렸지요. 그리고는 뜀박질을 멈추고 다시 걸을 때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기다리시던 할머니는 그때에야 길을 건너 부지런히 그분이 가던 길을 가셨지요.
왜 길을 건너가지 않고 기다리셨지? 나는 버들이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궁금했지요.
“우리들 학교 길을 끊지 않으려고 그러셨던 거야.”
머리가 굵은 누군가가 대답해주었지요. 그때만 해도 나이가 어린 나는 그 말뜻을 잘 몰랐지요. 학교길을 할머니가 먼저 건너신다고 해 길이 끊어지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길은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학교길과 학교길로 가는 그 일이 무슨 상관일까 그랬으니까요.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뒤 혼자 학교로 갈 때였지요. 그 교차하는 길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서 계시는 할머니는 또 만났지요. 나는 그때 할머니에게 왜 길을 건너시지 않냐고 여쭈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내 성미로 보아 그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때 버들이 할머니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아직도 또렷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늙은이가 구만리 같은 아이들 아침길을 끊으면 뭣에 좋을꼬.”
그 일이 있은 뒤 성장하여 나는 서울이라는 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그가 누구든 지나가고 있는 누군가의 앞길을 냉큼 가로질러가는 일을 삼갔습니다. 그가 나이가 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그때의 나처럼 나이가 한참 어린 학생이든 아니든 그가 나아가는 앞길을 싹둑 가로지르기보다 한 걸음 물러나 그가 지나간 뒷길을 건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언젠가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가로지르다’는 말을 찾아보았지요. 그때 그 말뜻이 ‘잘라 지나다’임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옛분들이 남의 앞길을 가로지르는 일을 삼가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후, 나는 또 나이를 더 먹었고, 퇴직을 하였지요. 아침이면 운동 삼아 동네 산에 오릅니다. 내가 오르는 그 길은 산 너머 공무원교육원으로 가는 숲길과 교차하는 데 그 시간이면 전철역에서 내려 출근을 하느라 부랴부랴 숲길을 오르는 이들과 만납니다.
나는 저만치서 걸어오는 이들을 보면 그들이 가는 출근길을 차마 끊을 수 없어 잠시 다른 일이 있는 것처럼 멈추어 섭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다는 그 옛날의 버들이 할머니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내 앞을 지나가고 나면 그제야 나는 그 길을 건너 다시 가던 길을 가곤하지요.
그때 그들을 위해 잠시 기다려주던 기쁨, 그 옛날 버들이 할머니께서도 몰래 이 기쁨을 누리셨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