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덴세와 조탑리
오덴세와 조탑리
by 한희철 목사 2017.06.14
여러해 전 독일에서 살 때 몇 분 손님들과 함께 덴마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9시간을 달리자 마침내 덴마크 땅이었습니다. 동행한 손님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검색 없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너무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오덴세 방문이었습니다. 오덴세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입니다. 클림트와 모차르트를 빼고 비엔나를 생각하기가 어렵듯이 오덴세 또한 안데르센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도시였습니다. 오덴세의 골목 구석구석까지 안데르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죽었을 때 덴마크의 모든 국민들이 상복을 입을 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니 당연한 일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안데르센 기념관에는 안데르센에 관한 온갖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과 종이 오리기에 사용했던 가위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밧줄도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사연이 재미있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안데르센은 언제라도 화재가 나면 밧줄을 타고 탈출을 하려고 늘 밧줄을 챙겨 다녔다는 것입니다.
넓은 잔디밭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로 만든 뮤지컬이 공연되어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물론 주변에 사는 이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나와 잔디밭에 편히 앉아 안데르센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전시관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야기 속에는 꿈이 있네요. 사랑도 있고요. 왜일까요, 이곳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건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에는 작은 흙벽돌집이 서 있습니다. 더없이 작고 허름하기 그지없는 토담집입니다. 그 집의 주인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 방에 들어온 생쥐한테도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시골교회 예배당 종지기로 살면서 자기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것들을 눈물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빛나는 동화를 썼던,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 살던 집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탑리에 사는 노인들은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는 것을 보고 놀랐고,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인세 수입만 해도 여간이 아닌 것을 알고 놀랐고, 시골에서는 엄청난 액수인 10억 원이 넘는 돈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장에 써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놀랐다는 것입니다.
오덴세와 조탑리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극과 극처럼 다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글을 생각하면 조탑리 흙집이 차라리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 사람을 무관심으로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허전하기도 합니다.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오덴세 방문이었습니다. 오덴세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입니다. 클림트와 모차르트를 빼고 비엔나를 생각하기가 어렵듯이 오덴세 또한 안데르센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도시였습니다. 오덴세의 골목 구석구석까지 안데르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죽었을 때 덴마크의 모든 국민들이 상복을 입을 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니 당연한 일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안데르센 기념관에는 안데르센에 관한 온갖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과 종이 오리기에 사용했던 가위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밧줄도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사연이 재미있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안데르센은 언제라도 화재가 나면 밧줄을 타고 탈출을 하려고 늘 밧줄을 챙겨 다녔다는 것입니다.
넓은 잔디밭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로 만든 뮤지컬이 공연되어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물론 주변에 사는 이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나와 잔디밭에 편히 앉아 안데르센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전시관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야기 속에는 꿈이 있네요. 사랑도 있고요. 왜일까요, 이곳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건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에는 작은 흙벽돌집이 서 있습니다. 더없이 작고 허름하기 그지없는 토담집입니다. 그 집의 주인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 방에 들어온 생쥐한테도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시골교회 예배당 종지기로 살면서 자기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것들을 눈물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빛나는 동화를 썼던,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 살던 집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탑리에 사는 노인들은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는 것을 보고 놀랐고,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인세 수입만 해도 여간이 아닌 것을 알고 놀랐고, 시골에서는 엄청난 액수인 10억 원이 넘는 돈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장에 써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놀랐다는 것입니다.
오덴세와 조탑리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극과 극처럼 다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글을 생각하면 조탑리 흙집이 차라리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 사람을 무관심으로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허전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