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신뢰감과 반목
인간적인 신뢰감과 반목
by 정운 스님 2017.05.30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송나라 때, 사대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북송(北宋) 신종 때 재상으로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신법(新法)을 실시하였다. 왕안석이 신법을 주장했던 것은 이민족과의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끝났는데, 급진적인 정책에다가 반대파의 세력과 부딪혔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정책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구법당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정치적인 현안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훗날 왕안석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사마광은 당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그는 왕안석의 죽음에 애통해 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편 왕안석은 그와 반대편에 섰던 구법당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와도 인연이 돈독했다. 말년에 소동파가 왕안석이 사는 마을에 온다고 하자, 왕안석은 친히 마중을 나갔고 그와 수 여일을 함께 지내며 학문과 시를 주고받았다.
또 마하트마 간디와 지나(jinnah)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실은 이 지나에 의해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되었다. 지나는 회교인 이슬람 독립국을 만들기 위해 평생 간디와 싸워온 정치인이자, 숙적 관계였다. 간디가 1948년 저격되었을 때, 지나는 정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가 비서를 통해 간디의 비보를 들었다. 그는 눈물을 흘린 뒤에 방으로 들어가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후 지나도 병이 들었다. 비록 간디와 지나가 종교적인 이념과 정치적인 성향이 달랐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또 우리나라에도 이런 우정을 나눈 인물들이 있다. 조선 후기 현종 때 명의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과 정치인 송시열이다. 두 인물은 당파로 나누어져 서로 원수나 다름없었다. 어느 해 송시열이 큰 병을 앓게 되었고, 어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송시열은 허목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아들을 보내어 약 처방을 부탁했다. 그런데 허목이 써준 처방전 약재 중에 독약이 첨가되어 있었다. 처방전에 독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허목을 의심했지만 송시열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송시열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상대를 끌어안는다는 것,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구축한 신념을 접어두고, 상대편 사람을 존중해 주는 일이 어찌 말만큼 쉽겠는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과 인연 맺는 것이 필연이건만, 의도치 않게 상대방과 악연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서로 반목을 하게 되고, 뜻이 맞지 않지만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을 보니, 마음이 따스해진다. 서로가 틀린 것을 내세우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름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 바로 이를 두고 군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정치적인 현안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훗날 왕안석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사마광은 당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그는 왕안석의 죽음에 애통해 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편 왕안석은 그와 반대편에 섰던 구법당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와도 인연이 돈독했다. 말년에 소동파가 왕안석이 사는 마을에 온다고 하자, 왕안석은 친히 마중을 나갔고 그와 수 여일을 함께 지내며 학문과 시를 주고받았다.
또 마하트마 간디와 지나(jinnah)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실은 이 지나에 의해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되었다. 지나는 회교인 이슬람 독립국을 만들기 위해 평생 간디와 싸워온 정치인이자, 숙적 관계였다. 간디가 1948년 저격되었을 때, 지나는 정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가 비서를 통해 간디의 비보를 들었다. 그는 눈물을 흘린 뒤에 방으로 들어가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후 지나도 병이 들었다. 비록 간디와 지나가 종교적인 이념과 정치적인 성향이 달랐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또 우리나라에도 이런 우정을 나눈 인물들이 있다. 조선 후기 현종 때 명의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과 정치인 송시열이다. 두 인물은 당파로 나누어져 서로 원수나 다름없었다. 어느 해 송시열이 큰 병을 앓게 되었고, 어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송시열은 허목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아들을 보내어 약 처방을 부탁했다. 그런데 허목이 써준 처방전 약재 중에 독약이 첨가되어 있었다. 처방전에 독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허목을 의심했지만 송시열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송시열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상대를 끌어안는다는 것,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구축한 신념을 접어두고, 상대편 사람을 존중해 주는 일이 어찌 말만큼 쉽겠는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과 인연 맺는 것이 필연이건만, 의도치 않게 상대방과 악연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서로 반목을 하게 되고, 뜻이 맞지 않지만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을 보니, 마음이 따스해진다. 서로가 틀린 것을 내세우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름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 바로 이를 두고 군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