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와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by 정운스님 2017.05.02
예수와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
이진명(1955~ )
김 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 씨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 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 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 노인은 병원으로 실려 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인터넷에서 읽은 시 구절이다. 이 시를 읽고, 한동안 손을 놓고 앉아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늙음과 병고, 죽음 앞에서 얼마나 아파야 하는 건가?!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아야 피안이라는 행복 세계에 도달할까? 늙었다고 해서 병드는 건 아니고, 노년의 인생이라고 해서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늙고 병이 깊어 죽음으로 연결되고, 거기에 가난과 고독까지 곁들여진 일부 노년층의 삶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찰 불교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수강생 중에 92세 보살님이 있다. 이 보살님은 혼자 지하철을 타고 불교대학원 강의실까지 온다. 근자 3주간, 건강이 좋지 않아 출석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출석한 보살님께 ‘건강이 좋아져서 다행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이 ‘스님, 너무 아팠어요.’라며, 반 투정 섞인 말을 하였다. ‘이 세상의 생명이라는 존재는 다 아프고, 늙는 고통을 겪는 겁니다.’라고 말을 건네었다. 삶에 달관한 도인처럼 교과서적인 답변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시 구절 앞에서는 뻥 뚫린 가슴이 한동안 이어졌다.
몇 년 전에 송파 세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갖고 있던 전 재산인 현금 70만 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놔두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일전에 부천의 세 자매가 자살했다. 세 자매는 ‘사는 게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는데, 이들 자매는 반복되는 실직으로 인한 가난이었다. 그런데 세 자매는 가난보다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잦은 실직으로 겪는 절망을 체감한 것이 정확할 듯하다. 희망 없는 삶이란 어쩌면 배고픈 고통보다 더 힘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 사회는, 그리고 인간세계는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건가? 필자는 종교인이다. 처절한 가난과 절망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인 진리나 어떤 대책을 내놓을 것이 없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불교 진리인 인과설을 고통받는 자에게 들이대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냥 ‘왜? … ’라는 물음표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굳이 내게 어떤 대안이라도 내놓아보라고 한다면, 소외층에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함께해준다는 동반자 의식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
이진명(1955~ )
김 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 씨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 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 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 노인은 병원으로 실려 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인터넷에서 읽은 시 구절이다. 이 시를 읽고, 한동안 손을 놓고 앉아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늙음과 병고, 죽음 앞에서 얼마나 아파야 하는 건가?!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아야 피안이라는 행복 세계에 도달할까? 늙었다고 해서 병드는 건 아니고, 노년의 인생이라고 해서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늙고 병이 깊어 죽음으로 연결되고, 거기에 가난과 고독까지 곁들여진 일부 노년층의 삶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찰 불교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수강생 중에 92세 보살님이 있다. 이 보살님은 혼자 지하철을 타고 불교대학원 강의실까지 온다. 근자 3주간, 건강이 좋지 않아 출석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출석한 보살님께 ‘건강이 좋아져서 다행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이 ‘스님, 너무 아팠어요.’라며, 반 투정 섞인 말을 하였다. ‘이 세상의 생명이라는 존재는 다 아프고, 늙는 고통을 겪는 겁니다.’라고 말을 건네었다. 삶에 달관한 도인처럼 교과서적인 답변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시 구절 앞에서는 뻥 뚫린 가슴이 한동안 이어졌다.
몇 년 전에 송파 세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갖고 있던 전 재산인 현금 70만 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놔두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일전에 부천의 세 자매가 자살했다. 세 자매는 ‘사는 게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는데, 이들 자매는 반복되는 실직으로 인한 가난이었다. 그런데 세 자매는 가난보다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잦은 실직으로 겪는 절망을 체감한 것이 정확할 듯하다. 희망 없는 삶이란 어쩌면 배고픈 고통보다 더 힘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 사회는, 그리고 인간세계는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건가? 필자는 종교인이다. 처절한 가난과 절망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인 진리나 어떤 대책을 내놓을 것이 없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불교 진리인 인과설을 고통받는 자에게 들이대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냥 ‘왜? … ’라는 물음표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굳이 내게 어떤 대안이라도 내놓아보라고 한다면, 소외층에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함께해준다는 동반자 의식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