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삶의 방향이 어디인가?
그대, 삶의 방향이 어디인가?
by 정운 스님 2017.04.11
불교 경전에 이솝우화 같은 비유가 담긴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다음 비유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황량한 들판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쿵쿵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여기저기 뒤돌아봐도 소리의 출처를 몰랐다. 또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편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이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저 코끼리에 밟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앞을 향해 무조건 달려갔다. 마침 한 우물이 있어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은 ‘코끼리로부터 해방되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래를 보니, 그 우물 밑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다시 올라가려고 우물 위 칡넝쿨을 붙잡았다.
밑으로 내려가자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있고, 다시 위로 올라가자니 미친 코끼리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래도 칡넝쿨을 붙잡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설상가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이 겨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갉아 먹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져있는데, 마침 그가 붙잡고 있는 칡넝쿨에서 꿀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현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꿀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있었다.
글 시작하면서 언급한 대로 이 이야기는 비유이다. 즉 황량한 들판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고, 우물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현 사람들을 비유하며, 미친 코끼리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죽음에 비유한다. 우물 아래 네 마리의 독사는 인간의 육신을 구성하는 지수화풍 4대를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세월에 비유하며, 칡넝쿨은 죽지 않고 살겠다는 삶의 애착을 비유한다. 또 칡넝쿨에서 떨어지는 꿀은 인간이 누리는 재산ㆍ수면ㆍ성욕ㆍ명예ㆍ식욕 등 인간의 욕망을 비유한다.
글쎄? 독자들마다 위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일 거라고 보는데, 개인의 사고에 맡긴다. 우리 인간의 육신은 영원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도 아닌 무상(無常)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애착부리고, 욕망과 아만심에 갇혀 산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욕망에 급급해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욕망으로 인해 인생을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죽음과 육신의 병고를 언제 만날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인데도 그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자신을 멀리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느 위치에 서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곧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량한 들판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쿵쿵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여기저기 뒤돌아봐도 소리의 출처를 몰랐다. 또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편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이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저 코끼리에 밟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앞을 향해 무조건 달려갔다. 마침 한 우물이 있어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은 ‘코끼리로부터 해방되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래를 보니, 그 우물 밑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다시 올라가려고 우물 위 칡넝쿨을 붙잡았다.
밑으로 내려가자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있고, 다시 위로 올라가자니 미친 코끼리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래도 칡넝쿨을 붙잡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설상가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이 겨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갉아 먹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살 수 없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져있는데, 마침 그가 붙잡고 있는 칡넝쿨에서 꿀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현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꿀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있었다.
글 시작하면서 언급한 대로 이 이야기는 비유이다. 즉 황량한 들판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고, 우물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현 사람들을 비유하며, 미친 코끼리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죽음에 비유한다. 우물 아래 네 마리의 독사는 인간의 육신을 구성하는 지수화풍 4대를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세월에 비유하며, 칡넝쿨은 죽지 않고 살겠다는 삶의 애착을 비유한다. 또 칡넝쿨에서 떨어지는 꿀은 인간이 누리는 재산ㆍ수면ㆍ성욕ㆍ명예ㆍ식욕 등 인간의 욕망을 비유한다.
글쎄? 독자들마다 위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일 거라고 보는데, 개인의 사고에 맡긴다. 우리 인간의 육신은 영원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도 아닌 무상(無常)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애착부리고, 욕망과 아만심에 갇혀 산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는 죽음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욕망에 급급해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욕망으로 인해 인생을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죽음과 육신의 병고를 언제 만날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인데도 그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자신을 멀리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느 위치에 서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곧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