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저 멀리서 잠시 소풍온 것
인생이란 저 멀리서 잠시 소풍온 것
by 정운 스님 2017.04.04
‘테헤란의 죽음(Death in Teheran)’이란 이야기가 있다. 페르시아의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권세 있는 부자가 하루는 하인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방금 죽음의 신과 마주쳤는데, 그가 저를 데려가겠답니다.”
그러면서 하인은 주인에게 ‘주인의 가장 빠른 말을 빌려 달라’고 다급하게 애원했다. 말을 빌려주면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가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순순히 승낙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난 뒤, 주인은 발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죽음의 신과 마주쳤다. 그래서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따지면서 물었다.
“어째서 그대는 나의 하인에게 겁을 주고 위협까지 하느냐?”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하였다.
“저는 그를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테헤란에서 그와 만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아직도 그가 이곳에 있기에 저는 단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것뿐입니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죽음은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인 손님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무기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사형수나 다름없다. 독일 시인 릴케는 ‘인생이란 죽음이 잠시 빌려준 생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삶을 다시 죽음으로 돌려주어야 할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말에도 어르신네가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는 원래의 본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알렉산더는 33세 똑같은 나이에 죽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진리와 빛을 주어 영원한 기쁨을 주었던 반면, 알렉산더는 이 세상을 정복하려고 죄업만 짓다가 인생의 의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알렉산더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동방원정을 이루고자 치른 수많은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그 가족뿐만 아니라 피정복 국가의 아픔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또한 중국의 진시황제는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49세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니 초로의 평범한 노인도 이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셈이다. 그래서 불교에 이런 진리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네 가지를 면할 수 없다.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둘째는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반드시 빈천해지며, 셋째는 어떠한 것이든 모이면 흩어지기 마련이고, 넷째는 건강한 육신을 가진 사람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
장자는 “자연은 끝없는 변화인데, 대개 생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니 이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심리학자요, 정신분석학자였던 빅터프랭클도 ‘죽음이란 삶의 한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삶의 의미를 안다면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가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음이란 인생의 한 연결선이므로, 삶을 진실하게 살았다면 죽음 또한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한다고 불편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를 사유해봄으로써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함께 살아 숨 쉬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주인님, 방금 죽음의 신과 마주쳤는데, 그가 저를 데려가겠답니다.”
그러면서 하인은 주인에게 ‘주인의 가장 빠른 말을 빌려 달라’고 다급하게 애원했다. 말을 빌려주면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가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순순히 승낙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난 뒤, 주인은 발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죽음의 신과 마주쳤다. 그래서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따지면서 물었다.
“어째서 그대는 나의 하인에게 겁을 주고 위협까지 하느냐?”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하였다.
“저는 그를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테헤란에서 그와 만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아직도 그가 이곳에 있기에 저는 단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것뿐입니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죽음은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인 손님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무기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사형수나 다름없다. 독일 시인 릴케는 ‘인생이란 죽음이 잠시 빌려준 생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삶을 다시 죽음으로 돌려주어야 할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말에도 어르신네가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는 원래의 본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알렉산더는 33세 똑같은 나이에 죽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진리와 빛을 주어 영원한 기쁨을 주었던 반면, 알렉산더는 이 세상을 정복하려고 죄업만 짓다가 인생의 의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알렉산더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동방원정을 이루고자 치른 수많은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그 가족뿐만 아니라 피정복 국가의 아픔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또한 중국의 진시황제는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49세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니 초로의 평범한 노인도 이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셈이다. 그래서 불교에 이런 진리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네 가지를 면할 수 없다.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둘째는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반드시 빈천해지며, 셋째는 어떠한 것이든 모이면 흩어지기 마련이고, 넷째는 건강한 육신을 가진 사람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
장자는 “자연은 끝없는 변화인데, 대개 생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니 이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심리학자요, 정신분석학자였던 빅터프랭클도 ‘죽음이란 삶의 한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삶의 의미를 안다면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가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음이란 인생의 한 연결선이므로, 삶을 진실하게 살았다면 죽음 또한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한다고 불편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를 사유해봄으로써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함께 살아 숨 쉬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