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서리의 추억

서리의 추억

by 김재은 행복플랫폼 대표 2017.03.28

수박은 언제 따먹을 때 가장 맛이 좋을까요.
강의 도중에 수강생들에게 묻는다. 잘 익었을 때, 또는 두들겨서 맑은소리가 날 때 등등 여러 답이 쏟아진다. 모두 틀린 답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주인이 없을 때가 가장 맛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답을 한다.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던지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랬다. 시골에서 태어나 세상을 웬만큼 살아온 사람들에게 ‘서리’는 짜릿한 그 무엇이다.
‘서리’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떼를 지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으로 되어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다 남의 밭에 몰래 들어가 오이며 토마토를 한 번쯤은 따먹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무나 당근을 뽑아 먹기도 하고, 고구마를 캐 먹기도 했다.
혼자보다는 서넛이서 할 때 더 재미있다. 그래도 한 해 농사를 망가뜨리는 법은 없다. 군것질이 귀하고, 배가 고프던 시절이니 그냥 몇 개 따먹으며 배고픔을 면하는 정도이다.
장난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리를 하고는 웬만해선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흔적이 있다 해도 그냥 넘어간다. 아이들의 그 문화를 존중하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쩌면 인정이라는 것이 그대로 살아있던 시절이니 공동체적 문화의 한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우리 마을은 채소 마을로 유명했다. 읍내 5일 장터에 가면 옹기종기 앉아 터를 벌리고 있는 사람들 중 반은 우리 마을 아주머니들이었다. 땅이 거의 없어 장에 내다 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어머니도 그사이에 끼어 자주색 갓을 팔기도 했다. 우리는 가끔씩 장에 다녀오는 길에도 밭의 길가 쪽에 있는 손에 닿는 토마토 등을 따먹기도 했다.
오늘날은 서리를 하다 들키면 아마도 절도죄로 그대로 경찰서행이 될 것이다. 툭하면 법을 따지고, 별거 아닌 것 하나로도 신고를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아마 당연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세상이 험해진 탓에 이제 그런 ‘짓’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주고받는 것이 분명하여 조금이라도 손해 볼 것 같으면 바로 감정적 반응을 하는 이 시대의 인심으로는 ‘서리’는 한낱 도둑질일 뿐이다. 그렇게 서로 그냥 남남으로 살아가니 ‘서리문화’를 이해할 여유가 생길 리가 없다.
어쨌거나 게임을 하거나 학원생활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 않은 요즘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서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작은 일탈 하나라도 꿈을 꾸다가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시대이다. 각자의 성안에 틀어박혀 정해진 것 외에는 하기 어렵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 ‘놀이 과외’까지 받아야 하는 안타까운 세상 속에 우리 아이들이 있다.
특히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그런 삶은 점점 더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먼 훗날 추억과 힘을 줄 아날로그적 거친(?) 삶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일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는 일탈이 누군가에게 삶의 작은 탈출구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무료한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주목한다. 참고 참다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억압된 삶에 작은 일탈이 때론 자유의 해방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오늘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이 작은 일탈을 꿈꾼다.
그 서리의 추억이 그대로 내 삶에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