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내가 선 이곳은

내가 선 이곳은

by 한희철 목사 2017.03.08

오래전 ‘내가 선 이곳은’이라는 제목의 동화를 쓴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의 작고 외진 시골 마을에서 목회를 하며 매주 손글씨로 써서 펴내던 소식지가 100호를 맞았을 때, 자축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높다란 절벽 한가운데 자라는 소나무 이야기입니다. 어깨를 맞대고 쑥쑥 자라는 숲 속 나무들과는 달리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며 바위 틈새로 어렵게 뿌리를 뻗어야 하는 소나무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습니다. 툭하면 비바람이 소나무를 힘들게 했습니다. 사납게 다가와선 단숨에 뿌리를 뽑으려고 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럴 때면 바위가 소나무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물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적은 물을 마시고도 오래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아마도 나이에 비해 소나무의 키가 턱없이 작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산이 단풍으로 곱게 물든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벼랑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적도 드물었고, 혹 지나간다 해도 고갤 아프게 들어 감탄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젊은이는 무슨 맘을 먹었는지 벼랑을 타고 오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어 소나무는 젊은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젊은이는 소나무 옆까지 올라왔습니다. 소나무는 가슴이 뛰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낸 것이지만 사람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소나무에도 사람이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저만치 올라가던 젊은이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던 소나무는 우지끈 허리가 부러지는 아픔에 눈을 떴는데, 놀랍게도 젊은이는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나무는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까짓 볼품없는 자기가 뽑히는 거야 별거 아니라 해도,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젊은이를 위해선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러지지 않으려고, 뽑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젊은이는 정신을 차렸고 조금 전 올라갈 때 늘어뜨려 놓은 끈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젊은이가 한 말을 소나무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맙다 소나무야. 네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네가 이곳에 없었다면.” 외롭고 볼품없는 자신도 아주 쓸모없지만은 않다는 걸 소나무는 그때 배웠습니다.
그날 이후 소나무는 기다림 하나를 마음속에 두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자신을 또 필요로 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때 그 일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족하다고, 그 일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소나무는 험한 벼랑 위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더 이상 외롭거나 슬프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시절 탓일까요, 문득 떠오른 이야기를 혼잣말하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