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한해가 저무는 길목에서

한해가 저무는 길목에서

by 이규섭 시인 2016.12.30

스페인에서 국경 없는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 파티마에 도착하니 서서히 어둠이 내린다. 서둘러 성모마리아가 발현한 성지 파티마 대성당을 향했다.
65m 높이의 거대한 탑이 대성당 앞에 우뚝 솟았다. 그 앞에 황금빛 예수성심상이 서쪽 하늘에 걸린 노을을 바라본다. 광장은 광대하게 넓다.
4년 전, 파티마를 방문하기 전에는 성모마리아 발현에 의구심을 가졌다. 첨단과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20세기에 성모가 강림하여 예언하고 태양이 불춤을 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5월 13일, 이리아 목초 지역에서 양치기하던 세 목동 앞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 앞으로 다섯번 매달 13일 이곳에 와서 평화를 기원하겠다고 약속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10월 13일 7만여 명의 신도들이 파티마로 몰려들었다. 태양은 여러 가지 색으로 바뀌고 빠르게 회전하면서 불춤을 추는 기적이 일어났다. 일각에서는 집단 환각과 집단 히스테리의 전형적인 경우로 지목했지만 7만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단 환각 상태에 빠질 수는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몰락(소련 해체 1991년),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시도 등 세 가지 예언도 적중했다.
1930년 포르투갈 주교들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하고 성지로 지정했다. 1953년 10월 대성당이 봉헌됐다. 대성당 안에는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세 목동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히야친타는 1919년 아홉 살 때, 프란시스코는 1920년 열두 살 때 유행성 독감으로 숨졌다. 당시 열 살인 루시아는 카르멜수녀원에 들어가 신앙생활을 이어오다 2005년 2월 13일 97세로 선종했다.
방문객들이 늘자 대성당 맞은편에 산티시마 트린다데 바실리카 성당을 새로 지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삼위성당으로 8,500명을 수용한다. 입구에 한글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드넓은 광장을 가로지른 2㎞의 ‘고난의 길’을 묵주기도를 하며 무릎걸음으로 오는 어린 신도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다음 날 파티마에서 멀지 않은 카보다로카(로카곶)에 들렀다.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땅 끝이다. 사각형의 십자가 돌탑 뒷면엔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의 시구와 함께 북위 37도 47분, 서경 9도 30분 좌표가 새겨져 있다. 낮은 목책이 둘러쳐진 언덕 위 빨간 등대는 한 폭의 그림이다. 파도가 빚은 높이 140m의 절벽에 서니 아찔하다. 대서양의 파도가 거친 호흡으로 칼바람을 몰고 온다. 땅끝에서 망망대해 대서양을 바라보며 내 삶의 끝은 언제쯤 어떤 모습일지 잠시 사념에 젖어 보았다.
또 한 해가 속절없이 저문다. 초등학생에서 고교생까지 맑은 눈망울로 강의를 듣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과 함께해 행복했다. 차창을 스치던 계절의 풍경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건강한 가운데 바쁘게 살 수 있게 해준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 파티마의 태양이 불춤을 추었듯 새해의 태양은 새 희망을 품고 힘차게 솟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