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속아주는 것도 미덕

속아주는 것도 미덕

by 이규섭 시인 2016.11.05

저승사자 복장을 한 손자의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면서 무슨 놀인가 궁금했다. 어린이집에서 열린 ‘핼러윈(Halloween) 파티’라고 한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서양에서 장삿속으로 들어온 놀이려니 했더니 전통이 오래됐다.
핼러윈은 고대 켈트족의 전통 축제다. 그들은 1년이 열 달인 달력을 사용했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을 축제의 날로 삼았다. 켈트족이 살던 아일랜드에서 축제가 시작 됐지만,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곳은 1930년대 미국이다. 유령과 귀신으로 분장한 어린이들이 집집이 돌아다니며 으름장을 놓으면 어른들은 사탕과 과자를 내놓는다. 악령의 해코지를 막기 위해 악령으로 분장한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일부 원어민 강사들이 핼리원 파티를 열면서 퍼져나갔다. 요즘은 유치원이나 학원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벤트를 열 정도로 확산됐다고 한다. 문제는 일회성 행사에 드는 소품 값이 만만찮아 부모들의 부담이 크다.
11월로 접어들자 기념일이 줄줄이 사탕이다. 1일은 한우 데이, 8일 브라 데이, 11일은 빼빼로 데이와 가래떡 데이, 14일은 무비 데이, 쿠키 데이, 오렌지 데이가 겹쳤다. 브라 데이는 브래지어 끈이 11, 컵 모양이 8과 유사한 점에 착안한 일본의 여성 속옷 브랜드 회사가 2001년부터 시작했고, 국내 속옷 업계가 2010년부터 마케팅을 펼쳤다고 한다. 무비 데이, 쿠키 데이, 주스 데이는 연인끼리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쿠키나 주스를 선물 하는 것뿐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빼빼로 데이는 토속 기념일이다. 영남지역 여중생들 사이에서 ‘빼빼로처럼 빼빼하게 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빼빼로를 주고받은 것이 지역신문에 기사화되면서 전국으로 확산 됐다. 빼빼로 생산 업체가 ‘기회는 찬스다’하고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1월의 대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유독 11월에 ‘OO데이’로 불리는 기념일이 많은 것은 10월과 함께 다양한 축제와 단풍놀이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달엔 공휴일이나 특별한 이슈가 없다. 제조·유통업체들이 비수기를 돌파할 마케팅 전략으로 하나둘씩 만들어 왔다는 게 통설 중 하나다.
불황이 깊을수록 ‘Day 마케팅’은 적극적이다. 올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험생을 겨냥한 감성 마케팅 전략이다. 관련 상품에 손 글씨로 ‘콱! 찍어! 그게 답이야’, ‘시험은 쿠키처럼 부셔버렷’ 등의 문구를 담았다.
각종 데이라는 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강요한 얄팍한 상술인 줄 알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조락의 계절,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쓸쓸하다. 세상 돌아가는 게 가슴이 뻥 뚫린 듯 허허로운 바람이 스쳐 간다. 실속을 중요시하는 ‘가치소비’만 미덕은 아니다. 상술에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척 지갑을 여는 것도 불황을 이기는 작은 미덕이다.